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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구돌산령지게놀이
지게놀이는 우리나라 전통의 운반수단이었던 지게를 이용한 민속놀이이다. 산이 많고 따로 길이 없는 농촌과 산촌에서는 지게가 필수적인 운반수단이었다. 강원도 양구지방에서는 노동의 고달픔과 단조로움을 잊고 즐거움을 얻고자 지게를 이용한 놀이를 했다. 양구 돌산령지게놀이에는 개인적으로 승부를 내는 지게걸음싸움과 단체로 하는 상여놀이가 있다. 지게걸음싸움은 지게의 두 다리 위에 올라가 지게 머리를 잡고 걸어가서 상대를 부딪쳐 쓰러뜨리는 놀이이다. 상여놀이는 편을 갈라 지게를 서로 묶어서 상여를 만들어 메고 구성진 상여소리를 부르며 어르다가 상대의 상여를 밀어 쓰러뜨린다. 승부가 나면 진 팀은 이긴 팀의 지게짐을 운반한다. 상여놀이에는 회다지놀이가 있는데 장례식 때 구덩이를 다지는 풍습을 놀이화한 것으로 회다지소리를 부르고, 지게작대기를 두드리며 논다. 재미있는 것은 회다지놀이 때 불효하거나 우애롭지 못한 사람, 마을일에 협조하지 않은 사람을 회다지의 인물로 정하여 한바탕 놀고 나면 그 사람의 심성이 고와진다는 개과천선의 교훈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양구 돌산령지게놀이는 전통적인 장례의식과 지게를 얽어 만든 독특한 산간민속놀이로 강원도 산간에서만 유일하게 보여지고 있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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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천성불사지석장승
성불사터에서 600m 떨어진 암자터 옆에 서 있는 돌장승으로, 절을 지키기 위해 세운 것이다. 장승의 허리부분이 부러져 아랫부분은 오랫동안 땅에 묻혔다가 최근에 발견되었고, 1993년 5월 마을 주민에 의해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크기는 높이 196㎝에 어깨너비가 60㎝이고 얼굴 두께 58㎝, 몸통이 47㎝로, 화강암을 깎아 만들었다. 조선시대 무관이 쓰던 전립 모양의 벙거지를 쓰고 있으며 눈과 코가 크고, 얼굴은 턱을 앞으로 내민 듯하다. 구슬띠 무늬를 두고, 조선시대 문신이 임금을 뵐 때 손에 쥐던 홀(笏)을 새겨 놓아 전체적으로 신장(神將)의 얼굴에 문인석의 몸체가 결합되어 있는 형상이다. 대개의 호법장승이 송곳니를 날카롭게 드러내 도깨비의 얼굴모습을 하는데 비해,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신장의 모습을 표현한 작품으로 몸체가 온전하게 조각되어 있는 보기드문 장승이다. 장승을 세운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장승의 모습이 일반적인 돌장승의 성격과는 다른 독특한 예로, 강원도에 호법장승이 없다고 알려진 지금까지의 인식을 바꿔주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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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상노리지경다지기
지경다지기는 새 집을 지을 때 집터를 다지는 작업을 말한다. 동네 사람들이 모여 함께하는 협동적 노동이며, 재앙을 쫓고 축복하는 의식이 담겨 있다. 상노리지경다지기는 터다지기의 단순한 의미를 넘어 전통적인 농경사회의 생활에서 유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철원 상노리지경다지기는 제의, 지경다지기, 여흥놀이의 세 마당으로 나눌 수 있다. 제의는 지경다지기를 하기 전에 땅을 건드림으로써 생길 수 있는 지신의 노여움을 막고자 하는 주술적 의식이다. 지신은 밤에만 활동한다하여 저녁에 횃불을 밝히고, 주인이 제주가 되어 축문을 읽고 고사를 지낸다. 지신제의가 끝나면 지경다지기에 참여한 사람들이 지경돌을 가운데 놓고 지경줄을 잡아 들었다 놓았다 하며 터를 다진다. 지경을 다지면서 지경소리와 가래질소리의 노동요를 부르는데, 노래의 첫 단락은 지역의 유래와 집터의 환경, 집주인의 내력 등의 내용으로 사정에 따라 즉흥적으로 부른다. 지경다지기가 끝나면 여흥놀이로 이어져 밤늦도록 술과 음식을 먹으며 한바탕 논다. 철원 상노리지경다지기는 농경생활의 전통적 민속문화와 전통의 축제적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문화유산이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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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아리랑(아라리)
정선아리랑은 정선 산간마을 주민들의 생활감정이 담긴 정선지방 특유의 민요로 ‘아라리’라고도 한다. 고려왕조를 섬기던 선비들이 고려가 망하자 정선지방에 숨어 지내면서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충절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담긴 시를 지어 부르는 것을 지방의 선비들이 듣고 한시(漢詩)를 이해하지 못하는 주민들에게 풀어 알려주면서 부르기 시작한 것이 정선아리랑의 맨 처음이라고 전해진다. 노랫말의 내용은 남녀의 사랑, 이별, 신세한탄, 시대상 또는 세태의 풍자 등이 주를 이루나 일제강점기 때에는 나라 없는 민족의 설움과 울분을 애절한 가락에 실어부르는 등 가락과 노랫말이 일정하지 않고 다양하다. 정선아리랑은 사설의 내용이 슬프고 가락이 애절하며, 엮음부분은 말하듯 사설을 분명히 전달하고, 늘어뜨리는 부분은 절규하는 듯한 호소력이 있다. 진도아리랑이 흥청거리고 신명나며 기교성이 두드러진다면, 밀양아리랑은 뚝뚝하고 남성적이다. 이에 비하여 정선아리랑은 잔잔한 흐름 속에 소박하면서도 여인의 한숨과 같은 서글픔을 지니고 있다. 현재 유영란, 김남기, 김형조, 김길자 씨가 정선아리랑 예능보유자로 활동하며, 최봉출씨가 명예보유자로 인정되어 있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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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만대장경
판수가 8만여 개에 달하고 8만 4천 번뇌에 해당하는 8만 4천 법문을 실었다고 하여 8만대장경이라고 부른다. 월정사에 있는 팔만대장경은 해인사의 고려대장경 경판에서 직접 찍어온 것이다. 조선 고종 2년(1865)에 찍어내어 월정사에서 보관하고 있다. 크기는 가로 84.6㎝, 세로 24㎝이고 한지에 인쇄하였다. 판의 끝에는 경전의 이름과 권수의 간행 차례가 기록되어 있다. 천자문 순서대로 새겨 놓았는데 총 1,511부 6,802권 81,137판으로 되어있다. 고려 때는 물론이고 조선초에도 인쇄되었으나 전부 남아있는 것은 몇 개 전하여지지 않는다. 이 대장경은 조선 고종 2년(1865)에 인쇄한 2부 가운데 하나이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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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대의 회장저고리
세조대의 회장저고리는 깃과 끝동, 섶과 옷고름 등에 짙은 배색을 한 회장저고리로 1975년 오대산 상원사에서 동자상에 금을 입히다가 불상 안에서 발견되었다. 불상이 세조임금이 1466년 상원사를 여러 차례 방문하는 중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 이 저고리 또한 1460년대에 누군가가 입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저고리의 크기는 길이 52.4㎝, 품 34㎝이며, 전체적인 모습은 품이 넓어서 소매길이와 저고리길이가 짧게 보일 정도이다. 깃은 네모로 각이 진 목판깃이며, 직선 형태의 소매와 짧고도 좁은 옷고름 등이 조선초기의 특징을 잘 갖추고 있다. 저고리의 전체적인 구성은 균형이 잘 맞으며, 색상도 전통적인 쪽물을 들인 염색이 잘 간직되어 있다. 같은 색깔을 옅고 짙게 하여 교대로 배치한 것은 의복의 배색효과를 잘 살렸는데, 이 점은 우리의 선조가 의생활을 단순히 흰색이나 원색에만 의존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한다. 저고리의 뒷 중심선 우측에 ‘장씨소대(長氏小對)’라는 글씨가 있어 저고리의 주인이 세조의 후궁 중 장씨 성을 가진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우리나라에 보관되고 있는 저고리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며, 조선초기 저고리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구성과 색상 면에서도 의복연구에 활용할 가치가 있는 자료이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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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목장
大木은 전통 목조건축물의 뼈대를 만드는 가장 중요한 기능으로 큰 부재의 목재를 치목⋅조립하는 일을 하는 목수이다. 우리나라 문화재 중에는 목조 건축문화재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지만 노후되거나 자연재해⋅인재 등으로 피해를 입을 가능성 또한 높기 때문에 효율적인 유지⋅보수와 전통 건축문화의 계승 차원에서도 그 기능을 보존⋅육성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특히, 예로부터 산 높고 골 깊은 강원도에서 산출되는 질좋은 목재들이 궁궐⋅사찰건축 등에 많이 사용되면서 강원도만의 특성을 지닌 전통 건축문화가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전통 건축문화의 체계적 전승⋅보존을 위해 지정가치가 크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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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보덕사해우소
해우소(解憂所)는 ‘근심을 해결하는 장소’ 라는 뜻의 사찰에서 화장실을 이르는 말이다. 전통적 형식을 지닌 보덕사 해우소는 앞면 3칸, 옆면 1칸 규모로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2층 누각식 건물이다. 앞뒤 2열로 나누어 각각 6칸씩의 대변소를 배치하여 남녀의 사용을 구분하면서 12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지혜를 엿볼 수 있는 건물이다. 상량문을 통해 조선 고종 19년(1882)에 세운 건물임을 알 수 있는 이 해우소는 세워진 지 오래 되었음에도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으며, 오래된 사찰 해우소 건물로는 강원도내에서는 희소가치를 지니고 있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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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대야동굴
영월 대야동굴은 용담굴의 남동쪽에 위치해 있으며 총 길이는 약 450m로, 두 갈래로 갈라진 나뭇가지 모양을 하고 있다. 동굴 안에는 지하수가 흐르고 있으며 지하수가 흐르는 곳에는 물방울 모양의 형성물들이 큰 덩어리로 늘어져 있다. 입구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다른 좁은 통로에서는 항상 물이 흘러나온다. 고드름처럼 생긴 종유석과 바닥에서 돌출 되어 올라온 석순이 잘 발달되어 있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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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규루및관풍헌
관풍헌은 조선시대 지방의 업무를 처리하던 관청건물로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의 건물과 부속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는 조계종 보덕사에서 포교당으로 이용하고 있다. 이곳에서 약 50m 정도 떨어진 곳에 자규루라는 누각이 있다. 자규루는 단종(재위 1452∼1455)이 세조(재위 1455∼1468)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유배되었을 때 잠시 지내던 곳이다. 단종은 이 누각에 자주 올라가 자규시를 지었다고 한다. 자규란 피를 토하면서 구슬피 운다고 하는 소쩍새를 가르키는 말로 자신의 처지를 견주어 지은 것이다. 원래는 세종 10년(1428) 군수 신권근에 의해 지어져 ‘매죽루’라 불리웠으나 단종의 자규시가 너무 슬퍼 누각이름을 매죽루에서 자규루로 바꿨다고 한다. 그 후 많이 퇴락해 민가가 들어섰는데, 정조 15년(1791) 강원도 관찰사 윤사국이 이곳을 돌아다니다 그 터를 찾아 복원하였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이며, 옆면에서 볼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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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 단종제례
조선 중종 11년(1516) 제6대 임금인 단종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우승지 신상을 보내 치제한 것으로 시작되어 숙종 24년(1698) 확립된 영월 단종제례는 장릉에서 올리는 유교식 제례의식으로 체계적 보존⋅전승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1791년(정조 15)에 시작된 배식단의 충신제향은 조선왕릉 중에서 유일한 것이라는 점에서 지정가치가 큼.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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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대
강림천변 절벽 위에 우뚝 서 있는 태종대는 조선 태종과 그의 스승 운곡 원천석에 관련된 일화가 있는 곳이다. 원천석은 태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왕자의 난을 계기로 실망해서 관직을 버리고 이곳에 은거하였다. 태종이 왕위에 오른 뒤 스승을 찾아 이곳에 왔으나,스승은 빨래하는 할머니에게 거짓으로 말하고 피신하였다. 태종은 할머니가 거짓으로 알려준 바위에서 기다리다가 스승이 자신을 만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돌아갔다. 그 뒤 이곳을 태종이 머물렀다 해서 태종대라 부르고 비석과 비각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 태종과 관련된 유적지로 그 시대의 일면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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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자기도공
전통자기도공은 전통적인 기법으로 자기를 만드는 사람 또는 기술을 말한다. 우리나라는 신석기부터 흙으로 토기를 만들어 사용했으며, 10세기 초에는 중국 당나라의 도자기 기술을 받아들여 상감청자를 만들게 되었다. 그 후 몽고의 침입으로 청자 제작기법은 쇠퇴하고, 조선 전기에 분청사기와 조선백자의 제작이 활발해졌다. 그러나 임진왜란(1592)을 거치면서 가마가 파괴되고 많은 도공들이 일본에 끌려가면서 도자기술이 쇠퇴하기에 이르렀는데, 다행히도 광주관요(官窯)가 유일하게 남게되어 조선백자를 중심으로 하는 큰 줄기를 이루게 되었다. 전통자기의 제작과정은 제토(製土)·성형(成形)·조각(彫刻)·시유(施釉)·소성(燒成) 등의 과정을 거친다. 제토과정은 돌을 깨뜨려 가루로 만든 뒤 흙을 풀어서 섞은 후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해 수비과정을 거친 다음 바탕흙(태토)을 짓이긴다. 짓이긴 흙을 물레에 올려 물건의 형태를 만들고, 성형이 끝나면 말려서 칼로 문양을 새긴다. 이어 초벌구이를 하고 유약을 바른 뒤 재벌구이를 마치면 작품완성이다. 제작용구는 물레·방망이·지래박·수레·물가죽·쇠홀태·목홀태·전칼 등이 쓰인다. 전통자기도공은 한국의 미를 표현하는 전통공예기술로서 보호하고 전승하기 위해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였다. 전통도자기 제작기능을 이수한 강원도의 장송모씨가 강원도자문화연구회 설립을 통해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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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성회다지소리
민요는 백성들 사이에서 저절로 생겨나 불러지는 노래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다. 직업·풍속·놀이 등을 기능으로 하여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지역이나 부르는 사람의 취향 또는 즉흥성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회다지소리는 장례행사 때 죽은 사람을 묻고 묘를 만들기 위해 사람들이 회(灰)를 섞은 흙을 다지면서 부르는 민요이다. 처음에는 느린 가락으로 시작되어 점차 빨라지며 후에는 사람들의 흥을 돋구는 메나리조로 변화되어 간다. 회다지소리는 선후창(先後唱)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상주(喪主)의 슬픔을 달래주는 한편 무덤을 만드는 사람들의 흥을 돋게 한다. 우리 조상들은 극락왕생의 내세관을 갖고 있어 상여소리·회다지소리에 해학적인 가사가 포함되기도 한다. 횡성회다지소리는 독특한 기능민요로서 보호하고 전승하기 위해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였다. 강원도에 살고 있는 예능보유자 양중하 씨가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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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홍천군청
1950년대 외국 건축물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절충적으로 표현되어 나타나는 발코니형(바렌다식) 건축물로 건립당시 관공서 건물의 특징을 잘 나타냄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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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천 겨리 농경문화
겨리란 두 마리 소가 끄는 쟁기를 뜻하는 것으로 중북부 산간지역에서 주로 행해진 논밭갈이 방식이다. 1970년대 농기계 보급으로 급속히 사라져갔으나 홍천군은 경사가 급한 지형상 특성으로 비교적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산간 지역은 토질이 척박하고 일조량이 적어 빠른 시간 안에 갈이와 파종을 끝내야 하고 땅을 깊이 갈아야하기 때문에 견인력이 큰 겨리가 효율적이었다. 두 마리 소가 서로 보조를 맞추어 나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하기 때문에 소와 쟁기질꾼 사이의 의사소통이 매우 중요하였고 이 과정에서 소모는 소리를 비롯한 독특한 겨리농경문화가 형성되었다. 겨리농경문화는 두 마리 소와 사람이 서로의 호흡을 맞추며 거칠고 험한 땅을 일구어 가는 삶의 산물이이며 지형, 소의 생활, 나아가 소모는 이의 고단한 삶이 올곧이 담겨 있는 문화라 할 수 있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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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 성내동성당
삼척 성내동 성당은 1949년 남양 2리에 처음 세워졌다가 1957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지어질 당시 춘천 교구에서 가장 큰 규모였고, 영동 지역을 대표하는 성당 중 하나이다. 벽돌과 목재로 지어진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이며, 426.03㎡에 달하는 성당 규모에 비하여 소박한 아름다움이 있다. 삼척이 내려다보이는 동산에 자리하여 어디서든 성당을 바라볼 수 있고 경관이 뛰어나다. 1946년 사직 2리에서 강릉 본당의 삼척 공소(公所)로 시작하여 꾸준히 신자 수가 늘어났다. 많은 사람의 노력으로 터를 늘리고 건물을 지어나가 지금에 이르렀다. 성당과 함께 지어진 사제관, 1961년에 지어진 성 요셉 의원 등은 단순한 건물의 개념을 넘어서 문화적, 역사적 가치가 깃들어 있다. 1949년 제임스 매긴(James Maginn) 진야고보(陳, James)가 이 성당 초대 신부로 부임하였는데 이듬해 6·25전쟁이 시작되었다. 제임스 매긴은 피난을 마다하고 이곳에 남아 성당과 사람들을 지키다가 북한군에게 희생되었다. 이를 기리기 위해 사람들은 1974년에 순교기념비를 세우고 2015년에는 흉상을 만들었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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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기줄다리기
줄다리기는 줄쌈이라고도 하며 풍년을 기원하는 농경의식의 하나로 정월 대보름에 행해졌다. 기줄은 큰 줄에 매달린 작은 줄이 마치 게의 발과 같다해서 게줄이라고도 하며, 기줄다리기는 한자어로 해색전(蟹索戰)이라고도 한다. 기줄다리기 유래에 대하여는 조선 현종(재위 1659∼1674) 때 삼척지방에 저수지를 많이 만들면서 시작되었다고 하나 정확한 기록은 없다. 삼척기줄다리기는 음력 1월 1일이면 우선 어린이들이 양편으로 나뉘어 북, 꽹과리 등을 두드리며 기줄다리기를 하는데 줄이나 규모면에서 작다하여 속닥기줄이라고 한다. 차츰 규모가 커지면서 7·8일 경이면 청소년들이 주동이 되는 중기줄다리기로 번지고, 15일경에는 어른들을 대상으로 해안지방과 산간지방으로 나뉘어 본격적인 큰기줄다리기가 시작된다. 이기는 편에는 풍년이 든다는 믿음도 있지만 그보다는 진편에서 삼척읍성의 수리나 제방수리 등의 노역을 해야하기 때문에 해마다 경쟁이 치열하다. 삼척기줄다리기는 재앙을 막고 풍년을 기원하는 민간신앙을 담고 있으며 주민들의 단결과 협동을 도모하는 마을 공동축제로서 그 의의가 있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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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척주동해비및평수토찬비
조선 현종 2년(1661) 때 삼척 부사를 지낸 허목(1595∼1682) 선생과 관련이 있는 2기의 비이다. 허목 선생은 성리학을 발전시켰으며 제자백가와 경서연구에 전념하였고 특히 예학에 뛰어난 인물이었다 한다. 척주동해비는 정상리 육향산에 자리하고 있다. 원래 정라진앞 만리도에 세워 놓았던 것을 비가 파손되자 숙종 36년(1710)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당시 이 지방은 파도가 심하여 바닷물이 마을까지 올라오고 홍수가 지면 주민의 피해가 극심하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허목이 신비한 뜻이 담긴 글을 손수 짓고 독특한 필체로 비문을 새겨 이 비를 세웠는데, 신기하게도 바다가 잠잠해지고 그후로 주민들의 피해도 없었다고 한다. 문장이 신비하면서 물리치는 능력도 지녔다 하여 ‘퇴조비’라고도 불리우며, 전서체(篆書體)에서 동방의 제1인자로 불리우는 허목 선생의 기묘한 서체로 인해 더욱 유명한 비이다. 평수토찬비는 척주동해비와 조금 떨어져 있으며 동해비와 같은 의미로 세운 것이다. 중국 형산의 우제가 쓴 전자비(篆字碑)중 일부를 허목이 목판에 새겨 보관하던 것을, 고종 광무 8년(1904) 왕의 명에 의해 칙사 강홍대 ·삼척군수 정운석 등이 돌에 그대로 새겨 넣은 것이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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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 대이리 통방아
삼척 대이리 통방아는 천연기념물 환선동굴 아래쪽의 ‘물골’이라는 곳에서 흘러내리는 개울의 북쪽으로 형성된 ‘골마을’의 개울 남쪽에 설치되어 있다. 대이리 통방아는 일반적인 마을공용의 통방아가 아닌 개인이 제작하여 사용한 개인용 통방아로, 직경 약 5m, 총길이 4.4m의 곡식을 찧는 방아이다. 6평 남짓한 평면에 원추형으로 서까래를 세워 그 위에 참나무껍질인 굴피로 지붕을 잇고, 수로에서 물을 끌어다 방아시설의 끝부분에 파인 홈으로 떨어뜨리면 물의 무게로 중심축이 위·아래로 움직여 방아를 찧는다. 삼척대이리 통방아는 산간문화의 일면을 살필 수 있는 생활용구로서 비교적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지붕이 굴피로 되어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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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 대이리 굴피집
동서로 길게 뻗은 계곡의 냇가 북쪽에 자리한 굴피집으로, 삼척 대이리 너와집(국가민속문화재) 바로 아래쪽에 있다. 언제 지었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하나 집의 상태로 보아 19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굴피란 일반적으로 참나무 껍질을 말하는데, 이 참나무 껍질로 지붕을 이은 집을 굴피집이라 하며, 굴피집은 원래 너와를 올리던 지붕을 1930년경 무렵 너와 채취가 어려워지자 주변에 참나무가 많은 산간 지역에서 재료의 채취가 쉽다는 점에 착안해 너와 대신 굴피로 지붕을 이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너와집과 다를 것이 거의 없다. 이러한 형식의 집들은 개마고원을 중심으로 함경도, 평안도, 강원도 등의 산간지역과 을릉도 등에 분포하고 있는데 주로 적설량이 많고, 여름과 겨울의 온도차 심한 지방의 산간지역에서 주로 나타난다. 평면의 특징은 밭‘전(田)’자 형식의 겹집으로 되어 있는데, 한 채의 집안에 마루, 안방과 사랑방 등의 여러 방과 정지(부엌), 심지어 마구(외양간)까지 들인 폐쇄적인 평면구성을 취하고 있다. 이는 기후 및 외부적 환경의 대응에 따른 결과로 극심한 추위를 견디기 위하여 각 실을 서로 붙여 건물의 외부 노출을 최소화하고 내부에서 발생한 온기(잠열)를 최대한 가두어 두기 위한 목적과 더불어 마구를 내부에 둔 것은 맹수로부터 가축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다. 세부적인 내부공간의 구성 특징은 집 중심에 있는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과 오른쪽 때에 따라 뒤쪽에 안방, 사랑방, 도장방 등을 두고 정지, 봉당, 마구 등을 배치한다. 봉당은 주로 대청 앞에 위치하는데 집의 내부로 들어가기 위해 출입문을 들어서면 바로 봉당이 되고 이 봉당을 거쳐 각 방과, 정지, 마구로 진입하도록 되어 있다. 봉당은 현대의 주택에서 현관과 같은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실내작업공간으로도 활용되었다. 이외에 너와집의 여러 가지 독특한 점은 지붕의 경우 용마루의 왼쪽과 오른쪽에 작은 삼각형모양 구멍을 내어 집 안의 연기를 밖으로 뿜게 만들었는데 이러한 형식의 집을 까치구멍집이라고도 하며 경북 북부지방에서도 다수 나타난다. 또한, 안방 혹은 사랑방의 구석에는 불을 피워 난방과 조명을 겸할 수 있는 시설인 ‘코클’과 봉당과 정지 사이의 벽체에는 조명의 목적을 위한 ‘두둥불’ 그리고 정지 한켠에 불씨를 보관하던 시설인 ‘화티’가 있다. 삼척에 분포하고 있는 너와집들과 더불어 우리나라 강원도 산간지역 민가의 유형과 발달과정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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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향교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지은 교육기관이다. 삼척향교는 태조 7년(1398)에 고사리재 기슭에 지은 것을 태종 7년(1407)에 옥서동 월계곡(지금의 당저리)으로 옮겼다가 세조 14년(1468)에 현재 위치로 옮겼다. 현재 향교에는 명륜당·동재·서재·대성전·동무·서무 등 여러 건물들이 있다. 향교의 앞쪽에는 배움의 공간으로 학생들이 공부하던 명륜당과 학생들의 거처인 동재·서재가 있다. 뒤쪽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여러 선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대성전과 동무·서무가 제사 공간을 형성하고 있어 전학후묘의 배치를 이루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책·노비 등을 지급 받아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에는 교육적 기능은 사라지고, 봄·가을 2차례에 걸쳐 제사만 지내고 있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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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 대이리 너와집
이 건물은 집주인의 선조가 병자호란 때 경기도 포천에서 이곳으로 피난을 와 지은 너와집이라고 한다. 너와집은 굵은 소나무나 전나무를 나뭇결을 따라 알맞은 크기로 잘라서 지붕을 얹은 집을 말한다. 대이리 너와집은 너비 30㎝, 두께 3~5㎝, 길이 60~70㎝로 쪼갠 너와를 기와처럼 처마부터 겹겹이 쌓아 올려 만들었다. 처마에는 길이 110㎝의 너와를 썼다. 작은 틈새는 그을음으로 막힌다. 여름철에는 적정하게 환기가 되고, 겨울철에는 두꺼운 흙벽과 온돌방, 황토, 눌린 천장에 의해 보온된다. 이러한 너와집은 산간 지방에 많이 있으며, 나무 대신 돌판을 사용하기도 한다. 온돌방, 도장방(창고), 부엌마루, 봉당(마루 앞 흙마루), 외양간 등이 한 처마에 외벽으로 감싸져 있어 산짐승 등의 외부 피해를 방지할 수 있다. 방의 모서리에는 고콜*이라는 벽난로가 있어 실내조명과 보조 난방으로 사용하고, 지붕 양쪽에는 환기구로 뚫어 놓은 까치구멍이 있어 부엌의 연기가 빠져나가게 되어 있다. *고콜: 관솔불을 올려놓기 위하여 벽에 뚫어 놓은 구멍.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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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노학동삼층석탑
설악산 수련원에서 달마봉 쪽으로 약 30분 정도 오르면, 한적한 절터에 이 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이 석탑은 단층(單層)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석탑으로, 1층 탑신과 지붕돌[옥개석(屋蓋石)]은 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졌다. 2층 지붕돌과 3층 탑신, 3층 지붕돌과 노반(露盤)은 각각 1석으로 조성되었고, 2층 탑신은 없어졌다. 탑의 가장 큰 특징은 1층 탑신의 4면에 사방불(四方佛)을 조성한 점이다. 연꽃 받침 위에 원형 머리 빛[두광(頭光)]과 몸 빛[신광(身光)]을 갖춘 좌상(坐像)을 조각하였는데, 마모가 심하여 정확한 형상을 알 수는 없지만 안정감 있게 돋을새김[부조(浮彫)]되었다. 강원 영동지방의 석탑 중에서 사방불이 조각된 귀중한 석탑으로, 조성 수법으로 볼 때 고려시대 중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의 높이는 1.8m이다. 석탑을 중심으로 약 200평의 대지가 마련된 점과 기와 조각과 석축이 있는 점으로 보아 암자터로 추정된다. 신흥사(神興寺)의 부속 암자인 소림암(小林庵) 터라고도 하지만 현 위치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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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 신흥사 안양암 아미타회상도
이 佛畵는 畵記 통하여 조성연대(1874년)와 제작자를 알 수 있는 수준 높은 작품으로, 조선후기 강원도 지역 불교회화의 중요한 자료가 된다는 점에서 지정 보존가치가 있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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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 철암역두 선탄시설
이 시설물은 철근 콘크리트 구조와 강재로 된 트러스를 사용하는 등 근대 재료와 공법으로 만든 산업 시설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20개 주요 시설물로 구성되어 있는데, 선탄의 주요 시설물은 원탄 저장과 운반, 경석 선별과 파쇄운반, 1,2,3차 무연탄 선탄, 이물질 분리, 각종 기계 공급과 수선창 등 다섯 분야로 이루어져 있다. 무연탄을 연료로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할 때 만들어진 국내 최초의 무연탄 선탄 시설로, 우리나라 근대 산업사를 상징하는 주요 시설로 평가받고 있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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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석장승
태백산맥으로 오르는 길 양쪽에 서 있는 2기의 돌장승이다. 처음에는 북쪽으로 1.2㎞ 떨어진 미루둔지에 있었는데, 40여년 전 태백산 망경사로 옮겼다가 다시 1987년 태백문화원의 주관하에 지금의 자리에 복원한 것이다. 복원과정에서 처음에는 없었던 자연석을 장승의 받침돌로 깔고, 받침돌에 각각 천장(天將)과 지장(地將)이라 새겨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임을 표시하였다. 그러나 그 생김새가 일반 장승의 부리부리한 모습이라기보다는 온화하고 점잖은 모습이어서 문인석(文人石)이나 미륵상에 더 가까워 보인다. 길 왼쪽에 있는 천장은 50㎝ 높이의 넓직한 받침돌 위에 서 있는 길이 170㎝, 둘레 130㎝ 크기이고, 반대편의 지장은 높이 80㎝의 뭉툭한 받침돌 위에 길이 155㎝, 둘레 135㎝의 크기로 서 있다. 둘 다 화강암 재질로 많이 닳아있어서 지장의 얼굴 모습은 알아볼 수 없는 상태이지만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지장의 주위에는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함께 세워놓은 솟대가 있는데, 꼭대기에 세 마리의 오리가 조각되어 있는 모습으로, 강원도 해안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영동지역에서 주로 볼 수 있는 형태이다. 두 장승의 제작시기는 알 수 없으나, 하늘을 섬기는 천체신앙과 천신에게 제를 올리는 태백산 천제단과 관련하여 태백산신의 수호신상으로서의 구실을 하였고, 지장의 코가 많이 닳아있는 것으로 보아 마을 수호신의 대상이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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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경찰서 망루
태백경찰서 망루는 한국 전쟁 당시 북한군의 침투에 대비하여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망루는 주변 동정을 살피고 비상시에 망대와 초소 역할을 하는 시설물이다. 대한민국의 근대화 과정의 혼란스러움을 엿볼 수 있는 유적이다. 이 망루에는 무장 경찰관이 근무하면서 비상시에 종을 울려 위험을 알렸다. 원형의 망루 각 층에는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창이 높이가 다르게 사방으로 나 있어 위급 상황 시 무장 저항에 대비하여 설계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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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 구 상수시설
일제강점기 산업시설로 당시의 기술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 및 근거가 되며, 최근까지 정수시설로 사용되어 온 시설로서 보존상태가 비교적 우수하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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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서원 학규현판
조선 숙종 31년(1705) 이세필이 삼척부사로 있으면서 삼척의 학문을 일으키기 위해 용산서원을 창건하고 학규 21조를 제정하여 이것을 손수 써서 판각한 것으로, 오늘날의 교칙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 학규현판은 피나무판으로 가로 156㎝, 세로 48㎝의 크기이다. 용산서원은 그후 고종 5년(186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문을 닫았다가 1966년 이곳의 사림들이 유서가 깊은 서원이라고 생각하여 지금의 건물로 새로 지어놓았다. 이 현판의 글씨는 글자 모양이 가장 반듯한 해자(楷字)로 썼고 이것을 음각하여 교생들이 지키도록 문에 걸어 놓았으며, 표제를 ‘학규(學規)’라 하였다. 이것은 관학인 향교의 일정한 규범과는 다른 사학인 서원의 성격이 잘 나타나 있어 서원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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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유품(벼루,토지양여서)
율곡 이이가 쓰던 벼루와 토지 양여서이다. 벼루는 가운데가 타원형으로 오목하게 패여 있고, 위쪽과 아래쪽에 나뭇가지와 잎사귀를 양각하였다. 벼루의 뒷면에는 글씨가 새겨 있는데, 정조 12년(1788)에 정조가 율곡 이이의 유품이 강릉에 있다는 말을 듣고 직접 보시고, 쓰신 것을 그대로 새긴 것이다. 보신 후 율곡의 유품을 소중히 보존하기 위해 어제각이라는 건물을 지어 보관하도록 하였다. 토지 양여서는 율곡이 그의 소유의 토지를 이종 권처균(權處均)에게 양여 한다는 증서로, 계약서나 각서와 같은 성질의 문서이다. 이 문서는 선조 12년(1579)에 율곡이 친필로 작성한 것으로, 이 때 율곡은 벼슬을 버리고 해주 석담에 가서 은거하고 있을 때였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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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련당
이 지방 출신으로 과거에 합격한 사람들이 고장의 발전과 미풍양속을 위해 함께 모여 의논하던 곳이다. 조선초에 지어졌으나 훼손되어 순조 10년(1810) 다시 건립하였다. 생원, 진사에 합격한 사람과 대과에 합격한 사람들이 계련당에 모여 자신들의 우의를 두텁게 하고 주민의 교화와 풍속을 바로 잡는데 힘썼다. 또한 정치활동에 대한 건의와 자문도 하던 원로원 구실을 하였다. 고종 31년(1894) 과거제도가 없어짐에 따라 모임도 함께 없어졌는데, 그 후손들이 모선계를 조직하여 관리해 오고있다.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앞쪽으로는 툇마루가 있고 왼편에 온돌방, 오른편에 대청마루가 있다.
문화재
신사임당초충도병
신사임당이 채색하여 그린 8폭의 병풍그림으로, 각 폭마다 각기 다른 풀과 벌레를 그려 놓아 ‘초충도’라고 부르고 있다. 병풍은 율곡 이이 선생을 모시는 송담서원에 있었는데, 순조 4년(1804) 강릉에 산불이 나면서 이 서원까지 불이 번지게 되어 분실되었다. 후에 강릉의 민가에 보관되어 오던 것을 후손인 이장희가 입수하여 율곡 기념관이 건립되자 1965년 기념관에 기증한 것이다. 그림은 자연의 풀과 벌레를 소재로 하여 각 폭마다 꽃과 관련된 풀벌레를 중점으로 그렸으며, 그 종류가 20여 가지나 된다. 오이나 가지는 풍요한 느낌을 갖게 하고, 벌레나 잠자리 등은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생동감을 가져다 주며, 풀꽃들에 날아드는 나비나 벌의 표현도 재미있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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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보문사청석탑
보문사터로 알려진 곳에 지금의 절을 새로 지을 때 중 땅속에서 발견된 탑으로, 점판암(벼루를 만들던 돌)으로 이루어진 청석탑이다. 2층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려놓은 구조인데, 기단과 탑신의 모습이 비슷하여 확연히 드러나지는 않는다. 현재는 이 탑을 보호하기 위해 탑의 아래에 화강암의 높고 널찍한 2층의 단을 마련해 놓았다. 아래·위층 기단은 윗면에 연꽃을 새겨놓았고, 탑신부의 각 몸돌에는 불교문자인 범어(梵語)를 새겼다. 현재 탑을 이루고 있는 전체가 모두 원래의 것은 아니고, 탑신의 2·3·4층의 몸돌과 5개의 지붕돌, 두 기단의 맨윗돌 외에는 최근에 새로 만들어 끼워놓은 것이다. 땅속에 오랫동안 묻혀있었던 탓인지 심하게 닳고 부서진 부분이 많으나, 고려시대의 청석탑 양식을 알려주는 귀중한 탑이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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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평장리마애공양보살상
강원도 원주시 소초면 평장리 탑고개의 커다란 암벽에 얕게 선으로 새겼다. 얼굴과 상체, 팔목 등은 총탄 자국으로 훼손되었으나 전체적으로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정면에서 오른쪽으로 45도 정도 돌려 앉아 있는 옆모습을 새긴 보살상이다. 신체 각 부분의 비례가 비교적 잘 맞고 통통한 편이다. 얼굴은 비교적 원만하고, 목 뒤로 내려진 머리카락은 어깨에 닿을 듯하다. 상체에 걸친 옷은 3∼4가닥의 선으로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허리로 흐르고 있고, 하체의 옷도 몇 가닥의 선으로만 간략히 표현하고 있다. 양 손은 어깨까지 올려 꽃으로 짐작되는 공양물을 바치고 있는데, 손가락은 가늘고 긴 유려한 선으로 새겼으며 양 팔목에는 팔찌가 있다. 앉아 있는 모습은 공양상이 흔히 취하는 자세로, 오른쪽 무릎은 꿇어 땅에 땋고 왼쪽 다리는 세우고 있다. 양 손을 올려 공양물을 바치는 모습, 머리에 쓴 보관(寶冠) 등은 원주매지리석조보살입상, 신선암석조보살입상 등 이 지역의 보살상과 동일한 형태인데, 고려시대에 독특한 보살상 유파가 형성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 보살상은 단순하면서도 선의 표현이 유려한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공양보살상만을 단독으로 새긴 희귀한 예가 된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문화재
벽걸이형 공전식 전화기
1955년 일본 중여통신기제작소(中与通信機製作所)에서 제작된 송·수화기가 분리된 형태의 공전식 전화기로 가입자가 수화기를 들면 회선에 직류전류가 흘러 교환대에 설치된 램프를 점등시켜 교환원을 호출하는 방식임. 독립식 전화기가 갖추고 있는 신호용 벨이 없는 것이 특징이며, 동 시대에 사용된 전화기 중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증설용 전화기로 희소성이 있음.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문화재
윤희순 의병가사집
여성 독립운동가인 윤희순(尹熙順, 1860-1935)이 의병들의 사기를 진작하기 위해 지은 낱장의 친필 가사들을 절첩의 형태로 이어 붙인 순한글 가사집이다. 윤희순은 ‘안사람 의병가’ 등을 지어 부르게 하고, 군자금을 모금하는 등 의병운동을 고취하고 지원하였으며, 대한독립단에서 활동하고 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등 치열한 항일운동을 하였다. 「윤희순 의병 가사집」은 여성 독립운동가의 문집이라는 점에서 희소성이 크고, 근대 가사 및 한글표기방식 등 국어학적 및 국문학적 연구 등의 중요 기록자료로서 가치가 크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문화재
청풍부원군 상여
청풍부원군 상여는 조선 후기 대동법을 시행하였던 김육(金堉)의 아들 청풍부원군 우명(右明 : 1619~1675)이 죽었을 때 시신을 향리로 운구하기 위해 나라에서 하사한 것이다. 이 상여는 묘소 북방 골짜기에 초가를 지어 보관하며 마을에서 공동으로 사용했었다. 상여(喪輿)는 긴 멜대를 중심으로 한 기본 틀 위에 관을 싣는 몸체를 조성하고 맨 위에는 햇빛을 가리기 위해 밝은 천을 넓게 펼친 모습이다. 몸체에는 봉황머리와 용이 정교하게 조각되고, 검은 천 위에 색띠와 술을 늘어뜨렸는데 망자의 명복을 빌고 슬픔을 덜려는 의미로 보여진다. 요여(腰輿)는 혼백과 죽은 이의 이름을 적은 위패를 모셔 나르는 작은 가마이다. 긴 멜대 위에 사각형의 방처럼 생긴 몸체를 얹고 맨 위에 네 개의 지붕선이 표시된 반구형의 지붕을 올렸다. 명정대(銘旌帶)는 붉은 천에 청풍부원군의 신분을 밝히기 위한 깃발로서 상여의 오른쪽에 세워두었다가 시신을 운반할 때 영구 앞에 서서 행차를 표시하고 길잡이 역할을 한다. 만장대(輓章帶)는 망자를 애도한 글을 적은 깃발로 명정의 뒤쪽으로 배치된다. 조선 숙종대에 만들어진 이 상여는 현재까지 남아 있는 상여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모양이 잘 보존되어 있어 당시 궁중에서 쓰던 상여인 ‘대여(大輿)’의 구조를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문화재
춘천 소양로성당
이 건물은 성 콜롬반 외방선교회 제임스 버클리(James Buckley) 신부가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에게 총살된 소양성당 주임 신부 콜리어(Anthony Collier)를 기리고자 건립한 성당이다. 국내 최초로 근대적 양식을 도입한 교회 건축물인 이 성당의 평면은 당시에는 보기 드문 반원형을 기본으로 하여 중앙 제단을 중심으로 신자석을 부채꼴로 배열하고, 원주면 중앙에 현관과 고해소, 좌우 끝단에 제의실과 유아실을 덧붙인 형태이다. 아치창, 버팀벽 등은 교회 건축에서 흔히 쓰는 고전적 기법이지만 일체의 장식을 배제한 단순한 형태와 밝고 기능적인 내부 공간은 근대적인 건축 개념을 적용한 것으로 중세풍의 양식적 교회 건축에서 벗어난 선진적 형태로 평가받고 있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명승
태백 검룡소
태백시 창죽동의 금대봉 기슭에 있는 검룡소와 그 일대 계곡은 특이하고 아름다운 지형이며 희귀한 동식물상을 보이고 있다. 검룡은 이무기를 이르는 말이며, 용이 되어야 할 이무기가 마을에 내려와 소를 잡아 먹자, 주민들이 흙으로 메워 버렸다고 하며, 이 곳 바위에 긁힌 흔적은 이무기가 할퀴며 생긴 자국이라 한다. 검룡소는 석회 암반을 뚫고 하루 2천톤 가량의 지하수가 솟아 나오는 냉천(冷泉)이며, 사계절 9℃의 물이 20m이상 계단모양 폭포를 이루고 있다. 폭포 아래에는 깊이1-1.5m, 폭1-2m로 암반이 파여서 그곳으로 물이 흘러 마치 용틀임으로 보인다. 한강의 발원지로 알려져 있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명승
양양 하조대
양양 하조대는 온갖 기암괴석과 바위섬들로 이루어져 있는 암석해안으로, 주위의 울창한 송림과 어울려 동해안의 절경을 볼 수 있으며, 조선의 개국공신인 하륜(河崙)과 조준(趙浚)이 은둔하며 혁명을 도모한 곳이라 하여 하조대라 명하였다는 등 많은 설화와 전설이 담겨있는 역사문화 경승지이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명승
설악산 십이선녀탕 일원
밤이면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하고 갔다고 하여 ‘선녀탕’이라 전해지고 있으며, 예로부터 탕이 12개나 된다고 전하여 오고 있으나, 실제는 8탕이 있으며, 탕의 모양에 따라 응봉아래 응봉폭포를 지나 첫 탕인 독탕, 북탕, 무지개탕, 복숭아탕(용탕)이 나오는데 그 중 폭포아래 복숭아 모양의 깊은 구멍이 있는 7번째 복숭아탕이 백미다.
폭은 그다지 넓지 않지만 크고 작은 소와 폭포들이 이어지고 잣나무와 박달나무, 소나무 등 거목들이 우거져 절경을 이룬다.
가을에는 십이선녀탕 계곡의 최고의 경치를 느낄 수 있으며, 계곡 사이로 짙게 물든 단풍과 암벽이 옥빛의 계곡수와 조화를 이루며 내설악의 장관을 연출한다.
겨울에는 탕을 연결하는 폭포들이 흰 얼음기둥, 혹은 넓은 얼음벽으로 변해 또 하나의 겨울풍경이 아름답게 연출된다.
조선 정조 때 성해응(1760~1839)의 《동국명산기》에서도 “설악산의 여럿 명소 중 십이선녀탕 을 첫손으로 꼽았다”고 하며, 1960년 한찬석씨가 펴낸 《설악산탐승인도지》에서는 “설악산의 최고 명승지로서 십이선녀탕의 절경을 듣기 전에는 설악의 진수를 논하지 말라”고 기록하였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명승
설악산 토왕성폭포
토왕성폭포는 외설악에 위치하고 있으며, 노적봉 남쪽 토왕골에 있다. 토왕성은 『여지도서』『양양도호부』고적조에 “토왕성(土王城) 부(府) 북쪽 50리 설악산 동쪽에 있으며, 성을 돌로 쌓았는데, 그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세상에 전해오기를 옛날에 토성왕이 성을 쌓았다고 하며, 폭포가 있는데, 석벽사이로 천 길이나 날아 떨어진다.”고 기록 되어있다. 『양양부읍지』에도 같은 기사가 실려 있는데, 모두 토왕성으로 되어 있다.
토왕성폭포는 화채봉에서 흘러 칠성봉을 끼고 돌아 상단150m, 중단80m, 하단90m로 총 길이가 320m의 3단을 이루며 떨어지는 연폭(連瀑)으로 하늘에서 비류하는 광경은 천상의 절경이다. 마치 선녀가 흰 비단을 바위위에 널어놓은 듯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폭포의 물은 토왕골을 흘러 비룡폭포와 육담폭포가 합류 쌍천(雙川)으로 흐른다.
성해응(成海應: 1760-1839)의 「기관동산수(記關東山水)」에서 토왕성폭포의 기이하고 웅장함을 묘사하였고,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의 「설악일기(雪岳日記)」에서 토왕성폭포를 중국의 ‘여산’보다 낫다고 표현하였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명승
대관령 옛길
대관령은 삼국시대부터 관련 지명이 史書에 기록된 곳으로, 대관령 옛길은 오래 전부터 영동과 영서를 잇는 교역로이자 교통로로서, 영동지역민들에게는 관문이자 강릉의 진산인 곳이다.
대관령 옛길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이래 주요 교통로의 역할뿐 아니라 이 길을 이용한 수많은 민중들의 애환이 서린 곳이기도 하며, 또한 세계무형유산으로 등재된 강릉단오제와 깊은 연관이 있는 길로 백두대간의 큰 고개인 대관령의 수려한 자연경관과 더불어 주변 계곡과 옛길의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사적
양양 오산리 유적
양양 오산리 유적은 지금으로부터 8천여 년 전 신석기 시대에 번성했던 마을 터이다. 이곳은 유적이 묻힌 순서가 분명히 구분되고 특징 있는 유물이 많아 당시 사람들의 생활을 생생히 전해준다. 이 유적을 발굴함으로써 한반도 신석기 시대의 상한선을 높였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신석기 문화 전파 방향과 문화적 관계를 추적할 수 있다. 오산리 유적에서 확인된 유구는 11기의 집터와 불을 피우던 자리, 도구를 제작하던 돌무지 흔적 등이 있다. 경제 활동을 짐작할 수 있는 유물로는 이음 낚시와 그물추, 그리고 돌톱과 화살촉 등 지역적 특징이 있는 간석기가 있다. 또 덧무늬 토기 등 다양한 형태의 토기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모습도 관찰할 수 있다. 정신 문화를 짐작할 수 있는 유물로 사람 얼굴, 동물, 배 등을 형상화한 토우가 발견되었는데, 당시 이곳 주민들의 종교관 등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 유적에서 출토된 흑요석은 백두산 지역에서 가져온 것으로 나타나 한반도 신석기 전반적 흐름을 파악하는 단서가 된다. 한반도 신석기 문화의 기원과 주변 지역 사이의 문화적 관계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는 유적이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사적
고성 문암리 유적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문암진리 1번지에 위치한 고성 문암리 선사유적은 동해안에서 내륙 쪽으로 약 400m 떨어진 구릉지대의 남쪽사면 사구(沙丘)위에 형성되어 있는데, 인근에는 초기철기시대의 유적이 분포하고 있어 여러 시기에 걸쳐 형성된 유적이다.
’98년 12월부터 ’99년 3월까지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전체 유적 중 약 200여평의 발굴조사를 한 결과 5개의 유물 포함층과 3개의 신석기시대 문화층이 퇴적되어 있음을 확인하였고, 3기의 주거지와 야외 노지 등 다양한 유구가 발견되었다.
또한 제3차 조사에서는 신석기 시대 주거지 5기, 야외노지 13기 등의 유구와 함께 경작유구인 ‘밭’이 확인되었으며, 밭과 함께 경작과 관련된 유물도 다량 출토되었다. 발굴유구와 출토유물로 볼 때 국내 최고의 신석기유적으로 알려져 있는 양양 오산리 유적(B.C.6000∼3000)과 연대가 비슷하고 최하층에서 발견된 유구는 더 오래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한반도 동북지방과 중국의 동북 3성 지방, 러시아 아무르강 연안을 포함하는 동북아시아의 신석기 문화와 한반도 선사인의 원류 및 이동경로, 당시의 문화계통과 전파정도 등을 밝히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사적
평창 오대산사고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과 왕실의 족보인 『선원보략(璿遠譜略)』을 보관하기 위해 지었던 조선 후기 5대 사고 중 하나이다.
『실록』은 조선 전기에 서울의 춘추관을 비롯하여 충주·전주·성주에 나누어 보관하였는데, 임진왜란(1592)으로 전주사고에 보관하고 있던 것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불타 없어졌다. 선조 39년(1606)에 다시 만들어 춘추관·태백산·묘향산·강화 마니산·오대산에 사고를 짓고 보관하였다. 그러나 인조 때 이괄의 난(1624)과 병자호란(1636)으로 『춘추관본』이 불타 없어졌고, 그 후 정족산·태백산·적상산·오대산에 보관하게 하였다. 『정족산본』과 『태백산본』은 현재 서울대학교에 보관되어 있고, 『적상산본』은 한국전쟁 중 없어졌으며, 『오대산본』은 일본에서 거의 불타 없어졌다.
오대산 사고가 있던 곳은 원래 물·불·바람이 침입하지 못한다는 상서로운 곳이었다고 한다. 사고를 지을 당시에는 실록각·선원각·별관, 그리고 사고를 지키던 수호사찰로 영감사가 있었으며, 참봉 2명과 군인 60명, 승려 20명이 사고를 관리하고 지켰다. 한국전쟁으로 모두 불에 탔으나 1992년에 사각과 선원보각으로 이루어진 사고의 건물을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사적
영월 정양산성
영월 정양산성은 남한강에 돌출된 정양산(해발 430―565m)의 자연지형을 잘 이용하여 돌로 쌓은 산성이다.
이 성은 문헌기록상 그 축조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삼국이 한강 유역을 놓고 다투던 삼국시대에 처음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세종실록지리지』에 ‘둘레 798보, 성안에 샘이 하나 있고, 창고 5칸이 있다’는 기록을 통해 조선 전기까지 계속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의 전체적인 평면모습은 서북쪽을 향하여 넓은 사다리꼴 또는 키모양을 이루고 있다. 이 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크게 구분되는데, 내성의 둘레는 1,060m, 외성의 둘레는 570m로서 성벽의 총 연장은 1,630m에 달한다. 그리고 북서쪽에 자리잡은 정양리에서 계곡을 따라 오르는 곳에 5개, 외성 내에 2∼3개의 차단벽을 갖고 있다.
성벽은 자연석을 적당히 다듬어 매우 정교하게 쌓았는데, 현재 남아 있는 성벽만 해도 높이가 최고 11.5m에 달한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고대 산성 중에서 성벽 규모만으로 볼 때 최대로 꼽히고 있는 보은의 삼년산성(사적 제235호)과 비교된다. 한편 남서쪽 일대에는 여장(女墻)이 남아 있다.
남쪽의 낮은 지대에는 비교적 넓은 평지가 형성되어 있는데, 여러 건물터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3군데에 다락문 같은 현문(懸門) 형식의 문터가 있고, 성벽이 꺾어지는 3군데에서는 성벽 바깥으로 돌출하여 만든 시설물인 치성(雉城), 혹은 곡성(曲城)의 흔적이 남아 있다.
영월 정양산성은 한강 상류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산성일 뿐만 아니라 성벽과 문터, 곡성과 치성, 그리고 후대의 외성과 차단벽을 갖춘 유일한 산성으로 보존상태도 양호하여 역사상·학술상 가치가 있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사적
삼척 두타산 이승휴 유적
이곳은 고려 시대의 뛰어난 문인이자 정치가인 동안거사(動安居士) 이승휴(1224~1300)가 벼슬을 버리고 내려와 집을 짓고 살던 터이다. 고려 충렬왕 13년(1287) 무렵 이승휴는 이곳에서 우리 민족의 역사서에서 가장 귀중한 자료 중 하나인 「제왕운기(帝王韻紀)」를 저술하였다. 이승휴는 어렵게 벼슬을 얻었으나 강직한 성품 탓에 여러 번 좌천되었다. 이에 어머니의 고향인 두타산 구동(龜洞)으로 돌아와 「제왕운기」, 「내전록」, 「동안거사집」 등의 책을 저술하였다. 특히 「제왕운기」는 우리나라 역사와 중국 역사를 칠언시(七言詩)와 오언시(五言詩)로 엮은 서사시로, 우리 역사의 독자성과 정체성을 밝히고 계승 관계를 체계화한 귀중한 자료이다. 「동안거사집」을 보면 이승휴는 언덕 위에 용안당(容安堂)을 짓고 여기서 생활하였다고 한다. 용안당 남쪽에 우물을 만들어 표음정(瓢飮渟)이라고 불렀으며, 그 위에 정자를 짓고 보광정(葆光亭)이라고 불렀다. 보광정 아래에는 연못을 만들어 지락당(知樂塘)이라고 불렀다. 이 내용은 1998년에 실시한 발굴 조사에서 절터와 연못의 흔적, 청자 가마터 등이 나오며 사실로 확인되었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보물
유숙 초상 및 관련 교지
광해군5년(1613)에 형난공신(亨難功臣)으로 책록되었던 유숙의 초상이 종이 초본 4점과 함께 남아 있으며, 유숙이 형난공신이었음을 알려주는 처(妻) 채씨에게 내려진 교지 및 유숙의 홍패·백패 등 관련 교지 3점이 전한다.
<유숙상>은 오사모에 흑단령을 입고 의자에 앉아 있는 좌안7분면의 전신교의 좌상으로서 중기 공신상의 전형적인 특색을 보여주며, 형난공신(亨難功臣) 책록을 계기로 하여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모의 높이는 상당히 낮으며, 사모의 뿔은 운문이 담묵으로 처리되어 있다. 가슴에는 백한문양(白鷳紋樣)의 흉배가 보이며, 삽금대(揷金帶)를 두르고 있어 이 초상화를 그릴 당시 유숙의 품계가 3품이었음을 말해준다.
안면은 전체적으로 옅은 살빛을 바탕으로 하여 이목구비를 약간 짙은 색 선으로 규정하였으며, 중기공신상에서 익히 보듯이 양 미간에 몇 개의 세로 주름선을 집어넣어 생각에 잠긴 듯한 진지한 모습을 보여준다. 눈동자의 동공주위를 니금색(泥金色)으로 칠한 것이 주목된다. 아래 눈꺼풀 밑에는 약간의 주름선을 자연스레 집어넣었으며 뺨에는 약간 홍기를 띠우고 있다. 입술선은 확실히 외곽을 규정하고 짙지 않은 붉은 색으로 그 안을 채워 넣었다.
관련 교지 3점은 유숙이 改名 전 유길(柳洁)이었다는 사실과 妻인 채씨에게 내려진 교지를 통하여 그가 형난공신이었음을 알려 주는 자료인 동시에 유숙의 傳記 및 이력 사항을 알 수 있는 사료로서 가치가 있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보물
양양 선림원지 홍각선사탑비
양양 선림원지 홍각선사탑비는 홍각선사의 공로를 기리기 위한 탑비로, 통일 신라 정강왕 원년(886)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남아 있는 비석의 파편과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 따르면, 홍각선사는 경서를 잘 알고 수양에 힘써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탑비는 비석 받침인 거북 모양의 귀부(龜趺)와 비문을 새기는 비석의 몸체, 그 위에 얹는 비석의 머릿돌로 구성된다. 이 탑비는 귀부와 머릿돌만 온전히 남아 있고 몸체는 파편만 남아 있었는데, 2008년에 몸체를 복원했다. 원래 몸체의 파편은 현재 국립춘천박물관에 있으며 파편에는 운철이 왕희지의 글씨를 모아 새긴 비문 일부가 남아 있다. 이 비문은 신라 후기에 왕희지의 글씨가 보급되었음을 보여 주는 좋은 자료이다. 받침의 거북은 등에 육각형의 무늬가 있는데, 머리는 거북 대신 용이 목을 꼿꼿이 세운 모습으로 바꾸어 조각했다. 등에 붙어 있는 네모난 돌은 몸체를 세우는 자리로 연꽃무늬와 구름무늬가 새겨 있다. 머릿돌에는 전체적으로 구름과 용이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고, 중앙에는 비의 주인공이 홍각선사임을 밝히는 글씨가 있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보물
강릉 수문리 당간지주
현재 강릉시 옥천동에 자리잡고 있으며, 일대가 절터로 추정되나 지금은 주거지로 변했기 때문에 절터의 존재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당(幢)이란 절에 행사가 있을 때 달아두는 깃발을 말하며 이를 달던 깃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는데, 당간지주는 당간을 양 옆에서 고정시켜주는 장치를 이르는 말이다.
원래의 위치에 있던 그대로이며, 두 지주가 1m 간격을 두고 동 ·서로 마주 서 있다. 깃대를 고정시켰던 흔적은 안쪽 윗부분에만 있는 직사각형의 구멍으로 알 수 있다. 두 지주의 최상단은 안쪽 꼭대기부터 바깥쪽으로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내려온다.
동쪽 지주의 남쪽 면에 조선 중종 3년(1508)과 순조 17년(1817)에 복원되었다는 기록이 새겨져 있어 흥미롭다. 각 면이 거칠고 폭도 고르지 않으며 조각이 없어, 당간지주로서 발달되지 않은 형식이지만 전체적으로 소박하고 충실하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보물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비
탑비란 승려의 출생에서 사망까지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다.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 탑비는 태조 24년(941) 진공대사 충담의 삶과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진공대사는 신라 말 고려 초의 승려로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이 고려 태조의 왕사*가 되었고, 흥법사에 머물다가 태조 23년(940)에 입적**하였다. 태조 왕건이 직접 비문을 지을 정도로 진공대사는 당대의 존경받는 고승이자 나라의 정신적 지주였다. 탑비의 받침 부분인 귀부(龜趺)는 용에 가까운 모습으로,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네 발로 바닥을 힘차게 딛고 있다. 등에는 이중의 육각형이 새겨져 있는데, 그 안에 ‘만(卍)’ 자와 연꽃무늬가 있다. 비의 덮개 부분인 이수(螭首)의 앞면 중앙에는 ‘진공대사’ 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그 주위에는 구름 속을 휘젓는 용이 조각되어 있다. 웅장하면서도 섬세한 조각이 당시의 높은 예술 수준을 보여 준다. 비문이 새겨진 몸돌은 임진왜란 때 파손되었으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 왕사(王師): 왕의 스승이 될 만한 승려라는 뜻으로, 지덕이 높은 승려에게 내리던 칭호, 국사보다 한 단계 낮다.
** 입적(入寂): 열반에 들었다는 뜻으로, 승려의 죽음을 이르는 말.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보물
강릉 해운정
강릉 해운정은 조선 중종 25년(1530)에 심언광(沈彦光)이 강원도 관찰사로 있을 때 지은 별당식 정자로, 강릉에서 오죽헌 다음으로 오래된 건물이다. 이 건물은 3단으로 쌓은 축대 위에 남향으로 지었으며, 오른쪽은 대청마루이고, 왼쪽은 온돌방이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꾸몄고, 대청 앞면에는 문을 달아 모두 열 수 있게 하였으며, 건물 주위에 툇마루를 둘렀다. 사방에 벽과 문을 붙이고 바닥에 온돌을 놓아서 오랫동안 머물 수 있었기 때문에, 이후에는 해운정의 건축 양식을 따라 정자를 세우는 일이 많았다. 건물 앞에 걸린 ‘해운정’ 이라는 현판은 송시열의 글씨이고, 건물 안에 걸린 ‘경호어촌(鏡湖漁村)’과 ‘해운소정(海雲小亭)’이라는 글귀는 중종 32년(1537) 명나라 사신 공용경과 오희맹이 쓴 글씨이다. 또한 건물 안쪽에는 이이, 김창흡 등 유명한 문인들이 지은 시 40수가 걸려 있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보물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1995)
고려 중기의 고승인 보조국사 지눌(1158∼1210)이 고려 희종 5년(1209)에 저술한 책으로 조선 성종 17년(1486) 광주 무등산 규봉암에서 간행하였으며, 1권 1책이다.
지눌은 8살 때 구산선문 가운데 사굴산파에 속했던 종휘에게 나아가 승려가 되었다. 당시 불교사회의 종파간 대립을 멀리하고 자유롭게 공부하였으며, 고려 명종 12년(1182) 승과에 급제한 후에는 보제사의 담선법회에 참석한 승려들과 함께 정혜결사를 맺었다. 지눌의 사상은 교종과 선종을 따로 나누지 않고 부처와 조사의 가르침을 올바로 이해하여 참선하면 그 요령을 얻게 된다는데 있다.
이 책은 보조국사 지눌이 사상적으로 가장 원숙했던 시기에 집필한 책으로 지눌의 선(禪)사상이 결집된 한국철학의 백미로 평가받고 있으며, 이로 인해 사찰강독의 교과서로 현재까지 교육되고 있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보물
양양 진전사지 도의선사탑
양양 진전사지 도의선사탑은 진전사를 세운 도의선사의 승탑으로 추정된다. 높이는 약 3m이고 화강석으로 만들어졌다. 도의선사는 선덕왕 5년(784)에 당으로 유학하고 헌덕왕 13년(821)에 귀국하여 선종을 펼치려 하였으나, 당시는 교종만을 중요시하던 때라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였고 이후 진전사에 들어와 수도하다가 입적(入寂)하였다. 도의선사와 연관 지어 볼 때 9세기 중반쯤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우리나라 석조 승탑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여느 탑과는 달리 탑신(塔身)이 팔각형이면서도 그 아랫부분에는 석탑처럼 네모난 기단(基壇)이 두 단 있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기단은 각 면마다 모서리와 중앙에 기둥 모양을 새기고, 그 위로 탑신을 괴는 팔각 돌을 두었으며, 옆면에 연꽃을 둘러 새겼다. 팔각 기와집 모양인 탑신에는 몸돌의 한쪽 면에만 문짝 모양을 조각했을 뿐 다른 장식은 하지 않았다. 지붕돌은 밑면이 거의 수평을 이루고 있으며, 빗물이 흘러내리는 경사진 면인 낙수면(落水面)은 서서히 내려오다 끝에서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위로 살짝 들려 있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보물
고성 육송정 홍교
고성군 간성읍 해상리와 탑현리의 경계에 있는 다리로, 하천의 폭이 12.3m 정도 되는 곳에 석축을 쌓고, 길이 10.6m의 다리를 놓았다.
홍예의 기초는 자연지형을 잘 활용하여 동쪽은 암반(높이 1.7m)을 그대로 이용하여 그 위에 홍예돌과 비슷한 크기의 장대석으로 1단의 지대석(높이 30㎝)을 두었다. 서쪽에서는 3단의 지대석을 쌓은 후 그 위에 홍예를 올렸는데, 1단에 2개씩의 장대석을 이어서 만들었다. 서쪽 지대석의 높이는 1단이 묻혀 있어 정확히 알 수 없으나 2단이 70㎝, 3단이 60㎝로 매우 거대하다.
건립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능파교와 함께 을축년(1745년)의 대홍수로 붕괴되었던 점을 고려할 때 능파교(1704년)와 비슷한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1748년에 편찬된 《간성군읍지(杆城郡邑誌)》에 육송정홍교가 언제 만들었는지 알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어 능파교보다 더 오래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자연지형을 잘 이용하여 축조한 단칸 홍예교로, 보존상태도 양호하고 조선시대 석조 다리의 아름다운 조형미를 잘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보물
인제 백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백담사 극락보전 안에 주불(主佛)로 모셔져 있는 이 목불좌상은 서방 극락세계에 살면서 중생을 위해 자비를 베푼다는 아미타불을 형상화한 것으로 조선 영조 24년(1748)에 만들어졌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 부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솟아 있다. 얼굴은 둥글고 단아하며 가는 눈, 작은 입, 오똑한 코로 인해 독특한 인상을 나타낸다. 넓은 가슴과 둥근 어깨가 당당한 인상을 주는 상체는 다소 평판적이며, 하체는 넓고 큼직하여 상체와 조화되고 있는데 이러한 특징은 이 불상이 당시의 나무로 만든 불상 가운데 대표작임을 알려주고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두꺼운 편으로 옷주름이 곡선으로 처리되고 있으며, 가슴에는 U자형의 중복된 주름을 보이는데 이러한 주름들은 조선 초기의 특징이 이어진 것이다.
18세기 전반의 불상 가운데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되는 이 목불상은 불상의 조성연대를 알려주는 발원문(發願文)과 많은 복장물이 있어 특히 주목된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보물
평창 오대산 중대 적멸보궁
적멸보궁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 한 사찰의 법당을 일컫는다. 태백산 정암사와 설악산 봉정암, 사자산 법흥사 오대산 월정사의 적멸보궁 등 강원도의 네 곳과 경남 양산 영취산 통도사의 적멸보궁을 합하여 5대 적멸보궁이라 한다. 월정사 적멸보궁은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오면서 석가의 진신사리를 가져와 오대산에 봉안하고 이 보궁을 창건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낮은 한 단의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 의 규모로, 단층인 팔작지붕의 겹처마 집이다. 건물 전면의 중앙에만 두 짝의 판문을 달고, 좌우측에는 중방을 설치하고 협간 아래는 판벽을 하고, 그 위에 띠살창을 한 점이 특이하다. 이 건물은 그간 조선시대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어 왔으나, 최근 건물 내부의 구조에서 15세기 후반 양식의 다포와 고식 단청, 배흘림기둥 등의 특징이 조사되어 조선 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적멸보궁은 보통의 법당과 달리 곁칸과 속칸이 벽으로 구분된 겹집의 형태라는 사실이 보고되어 있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보물
홍천 물걸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대승사에는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외에도 석조여래좌상, 불대좌 및 광배 4기가 있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그 위로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크게 솟아 있다. 약간 고개를 숙인 얼굴은 풍만하지만 턱이 뾰족하여 단정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쳐 입고 있는데 긴장감이나 탄력적인 모습이 사라진 채 다소 투박하고 무겁게 늘어진 모습이 역력하다. 옷주름은 어깨에서 두 팔을 거쳐 무릎에까지 나타나 있으나 평행선으로 되어 약간 형식적으로 처리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손은 오른손 검지를 왼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습으로 일반적인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손모양과는 반대로 되어있다.
불상이 앉아있는 대좌(臺座)는 8각 연화대좌로 상대·하대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중대에는 부처에게 공양을 드리는 사람,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 향로 등이 새겨져 있다.
8세기 불상에 비해 양감이 없는 평판적인 신체, 긴장감이 사라진 무겁고 해이한 옷주름 등으로 보아 9세기 후반에 유행하던 비로자나불상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하겠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보물
화천 계성리 석등
계성리 마을에 서 있는 고려시대의 석등이다. 이 마을에는 계성사(啓星寺)의 옛터가 있으며, 절터에는 쓰러진 석탑의 일부와 종모양의 부도 등이 흩어져 있다. 이 석등은 일제 때 절터에서 약 200m밑으로 강제로 옮겨진 것으로 정확한 원래의 위치는 알 수 없다.
일반적으로 석등은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이 중심이 되어, 아래로는 이를 받쳐주는 3단의 받침돌을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이 석등은 신라시대에는 8각, 고려시대에는 4각인 일반적인 것에서 벗어나 독특하게 6각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아래받침돌은 거의 묻혀 있어 윗부분만 보이며, 가운데받침돌은 원통형의 기둥에 띠를 두른 것으로, 띠를 이루는 부분에 각종 무늬를 새겨 놓았다. 원통형의 기둥은 고려시대 석등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것이나, 그 모양이 전라도 지방에서 유행했던 장고 모양을 닮아 있어 흥미롭다. 화사석은 특히 주목되는 부분으로, 6개의 돌을 세워 6각을 이루게 하였다. 각각의 돌은 좌우를 반타원형으로 깎아낸 것으로, 옆돌과 맞추어져 6개의 타원형 창이 만들어 졌다. 지붕돌은 각 귀퉁이선이 뚜렷하고 추녀 위로는 꽃조각이 작게 돌출되어 있어 멋스럽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를 놓았는데, 지나치게 커서 아래를 누르고 있는 듯 하다.
현재까지 알려진 6각형 석등은 북한지역에 2기를 포함하여 모두 4기가 남아 있는데, 이 석등도 그 중의 하나이다. 높은 기둥 위에 놓여 있어 전체적으로 아름다운 균형감이 흐르고 있으며, 건립연대는 고려 전기로 추정된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보물
철원 도피안사 삼층석탑
도피안사 법당 앞에 세워져 있는 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그 구조가 특이해서 보통 4각의 돌을 이용하는데 비해 여기에서는 8각 모양의 돌로 높게 2단을 쌓았다. 아래층 기단의 8면에는 안상(眼象)이 조각되어 있다. 이 기단의 맨 윗돌에는 윗층 기단을 괴기 위한 높직한 8각의 괴임돌이 놓여져 있는데, 이곳에는 연꽃무늬의 조각이 새겨져 있다. 윗층 기단은 매우 높으나 각 면에 꾸밈이 없다. 다만, 기단의 맨윗돌 아랫면에 다소 두툼한 느낌의 연꽃무늬를 조각하여 둘러 놓았다. 탑신과 닿는 곳에는 높은 3단의 받침을 두어 1층 몸돌을 괴도록 하였는데, 이러한 기단의 꾸밈새는 석탑의 기법이라기보다는 불상의 기단 기법으로 보이며, 덮개돌 윗면의 높은 괴임형식은 9세기 통일신라의 석탑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수법이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에 각각 하나의 돌을 사용하였다. 각 층의 몸돌은 모서리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겼을 뿐 다른 장식은 없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1층은 4단, 2·3층은 3단인데, 조각이 얕아서 다소 무거워 보이긴 하나, 네 귀퉁이가 한껏 위로 들려 있어 아름다운 모습이다.
기단의 꾸밈새에서 보이는 특이한 양식, 지붕돌 받침이 4단, 3단으로 일정치 않은 점 등이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모습임을 보여준다. 탑을 만든 시기는 법당 안에 모셔진 불상에 기록된 내용을 통해, 통일신라 경문왕 5년(865) 절을 건립할 당시 불상과 함께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보물
원주 구룡사 삼장보살도
원주 구룡사 삼장보살도는 1727년에 화승 白基와 英輝가 조성하여 치악산 구룡사에 봉안했던 삼장보살도로서, 「水陸無遮平等齋儀撮要」, 「天地冥陽水陸齋儀纂要」, 「五種梵音集」 등 수륙재의식집에 의거하여 天藏菩薩, 持地菩薩, 地藏菩薩 등 세 보살의 會上을 묘사하였다. 조성발원문과 후령통, 다라니 등이 들어있는 복장낭도 잘 남아있는데, 화기에 기록된 제작 시기, 연화질 등이 일치한다. 가로와 세로로 접힌 자욱으로 인해 부분적으로 안료가 박락되기는 했지만, 밝은 녹색과 적색을 중심으로 노란색과 파란색 등 중간색이 어우러진 화사한 색감, 균형잡힌 신체에 둥근 얼굴, 살짝 치켜 올라간 눈, 가늘고 긴 코, 작고 꽉 다문 입술 등 18세기 전반 불화의 특징이 잘 표현된 수작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18세기 전반 靈駕薦度 및 追善供養을 위한 수륙재의식 때 봉안되었던 작품으로서,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하여 보호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평가된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보물
영월 창절사
「영월 창절사(寧越 彰節祠)」는 세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열 명의 충신(忠臣)을 제향하기 위해 1685년에 건립된 사우(祠宇)로, 숙종 대에 ‘창절’이라는 사액을 받았으며, 1705년 현 위치로 이건되었다.
영월 창절사는 다른 사우에 비하여 비교적 규모가 크며, 십충신 등을 기리기 위해 설립된 사당 외에도 유생들이 모여 학문하는 강학공간인 강당(講堂)과 동서재(東西齋), 배견루(拜鵑樓, 누각)을 갖추고 있어, 일반적인 조선시대 서원과 같은 구성을 보여준다.
영월 창절사는 인근에 위치한 장릉과 함께 영월지역에서 단종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건립되었으며, 건축물에 남아 있는 익공의 형태 등 건축 구조적 특징이 18세기의 건축적 특징을 반영하고 있어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높아 국가지정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충분한 것으로 판단된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보물
사인비구 제작 동종 – 홍천 수타사 동종
조선 숙종 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인 사인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조선시대 종이다.
사인비구는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다. 현재 그의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다.
이 종은 사인비구가 만든 종 가운데 문경 김룡사동종(보물)과 함께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 주변에 굴곡진 화문을 첨가한 독특한 당좌로 표현하여 완숙미와 독창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김룡사 동종이 만들어진 1670년에 그 보다 3개월 뒤에 만들어진 종임을 알 수 있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천연기념물
향로봉·건봉산 천연보호구역
향로봉·건봉산 천연보호구역은 강원도 고성군과 인제군에 걸쳐 위치한다. 칠절봉으로부터 향로봉·건봉산을 지나 비무장 지대까지 이르는 이곳은 우리나라 중부 온대림의 특성을 그대고 지니고 있다. 건봉산의 고진동 계곡에는 신갈나무가 주로 자라고 철쭉·산앵도나무·조록싸리·조릿대 등이 함께 숲을 이루며, 소나무·전나무·서어나무·층층나무도 자라고 있다. 향로봉 지역은 해발 500m부터 서어나무류 군락, 700m부터 사스래나무와 함박꽃나무 군락이 형성되어 있다. 정상 부근은 군 작전상 큰 나무들을 제거한 탓으로 미역줄나무, 다래덩굴이 엉키어 있고 능선 전반에 걸쳐 하늘말나리,금강초롱 등의 희귀 식물들이 자라고 있다. 향로봉과 건봉산의 계곡에는 칠성장어·산천어·금강보치·버들치·가는돌고기 등 보호가 필요한 물고기들이 서식하고 있으며, 조류는 건봉산 지역에서 24종, 향로봉 지역에서 11종이 확인된 바 있다. 포유류는 24종이 확인되었는데, 이 가운데 수달·사향노루·산양·곰·하늘다람쥐 등은 특별한 보호가 필요하다. 향로봉·건봉산 천연보호구역은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천연의 숲이 그대로 유지되어 있고, 동·식물상이 잘 보존되어 있는 대표적인 지역이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현재 향로봉, 건봉산의 보호를 위하여 공개제한지역으로 지정되어 있어 관리 및 학술 목적등으로 출입하고자 할때에는 문화재청장의 허가를 받아 출입할수 있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보물
속초 신흥사 영산회상도
‘속초 신흥사 영산회상도’는 1755년(영조 31) 수화승 태전(泰巓)을 비롯한 10명의 화승이 제작한 불화로서, 신흥사에서 유출된 후 70여년 넘게 해외에서 떠돌다가 최근 미국에서 환수된 작품이다. 신흥사가 대대로 왕실과 깊은 관련을 맺고 번창해 온 사찰이라는 점에서 이 불화 역시 이러한 신흥사의 사찰 성격을 보여주는 작품으로서 의미가 있다. 단정하고 섬세한 인물의 묘사, 부드럽고 원만한 원형구도를 기반으로 정확한 좌우대칭의 원칙을 구현하였으며, 수직 상승구도의 안정된 원근법을 도입해 전체적으로 균형있는 배치와 구도를 보여주고 있어 18세기 중엽 제작된 불화의 수준 높은 예술성을 보여준다. 이 불화에 참여했던 화승은 태전, 칠혜, 휴봉, 태상, 재옥, 의률, 순명, 두훈, 성총, 재성 등 모두 10명이며, 이중에서 칠혜, 두훈, 성총 등은 서울, 경기, 경상도 지역에서 두각을 나타낸 조선 후기 대표적 화승이자 불화 양식의 발전에도 기여했던 화승들이다. 이들 중 칠혜는 조선 후기 대표 화승으로 인정받는 의겸(義謙)을 계승한 각총의 화풍을 계승한 화승으로, 의겸화풍의 계승관계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다. ‘속초 신흥사 영산회상도’는 현재 강원도에 소수만 남아있는 18세기 불화이자, 왕실의 원찰인 신흥사에서 천도재인 영산재 설행의 필요에 의해 조성하여 금당인 극락전에 봉안하였다는 점에서 역사적ㆍ학술적ㆍ종교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한 화풍상 경기도, 전라도 및 경상도 등 각 지역 불화의 특징들이 결합된 양상을 찾아볼 수 있다. 불상을 비롯한 각 존상들의 정제된 형태와 차분한 분위기, 중간 색조의 색감 등 품격 있는 화풍을 구현했다는 점에서 높은 예술적 성취가 인정되므로, 보물로 지정해 보존 관리해야 할 가치가 충분하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보물
동해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좌상
삼화사 대웅전에 모셔져 있는 이 불상은 시멘트로 만든 대좌 위에 머리로부터 가슴과 배, 등판을 붙여 안치했던 것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한 철불좌상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은 듯하며, 얼굴에는 비교적 살이 올라 통일신라시대의 풍이 엿보인다. 가늘고 길게 뜬 눈, 오똑한 코, 두툼한 입술은 전체적으로 단정한 모습이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주름이 도식적이며, 복부까지 속이 드러나 허리띠와 드리워진 매듭이 보인다. 손은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을 밖을 향하게 하고, 왼손은 아래로 내려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도록 복원하였다.
복원과정 중 오른쪽 등판면에서 약 10행 161자로 된 글을 발견하였다. 내용에 노사나불이란 명칭이 2번 나와 이 불상의 이름을 알 수 있으며, 시주자의 부모를 위해 880년대에 활약한 결언 스님을 중심으로 화엄경에 따라 불상을 조성했다는 기록을 통해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만든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10세기 이후까지 내려오는 이두의 사용과 한자를 국어 어순에 맞추어 배열하는 문장 등으로 미루어 그 당시 국어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로 생각된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천연기념물
양양 오색리 오색약수
토양에 흡수된 물이 나트륨과 철분을 용해한 후 기반암 절리를 통해 솟아나고 있으며, 약수가 대개 암설층에서 솟는데 반해 기반암에서 솟아나는 희소성이 있다. 나트륨 함량이 높아 특이한 맛과 색을 지니며, 1500년경 오색석사 사찰의 스님이 발견한 이후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문화적인 가치가 있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천연기념물
양양 포매리 백로와 왜가리 번식지
백로는 열대에서 온대에 이르는 전세계에 널리 분포하며 우리나라에서는 백두산 지역을 제외한 전지역에서 번식한다. 하천·호수·갯벌 등에서 볼 수 있으며 이른 봄부터 늦가을까지 우리나라에서 번식하는데, 주로 소나무·은행나무에서 집단 번식한다. 왜가리는 우리나라의 백로과 조류 중에서 제일 큰 새로서, 우리나라 전지역에 걸쳐 번식하는 여름새이다. 그러나 일부 적은 무리는 텃새로서 우리나라의 남쪽지방과 섬지방에서 겨울을 나기도 한다. 논·하천·해안·갯벌에서 살며, 개구리·물고기·뱀 등을 잡아 먹는다. 양양 포매리의 백로 및 왜가리 번식지에는 70∼150년 정도 된 20∼25m높이의 소나무가 약 500그루되는 숲이 있으며, 백로와 왜가리는 이곳에 둥지를 틀어 번식하고 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될 당시에는 전체 숫자가 2,000마리 이상 되었으나, 현재는 농약의 살포 및 각종 생활환경이 악화되고 소나무 또한 새들의 배설물로 점차 줄어들어 그 수가 감소되고 있다. 양양 포매리의 백로 및 왜가리 번식지는 동해안의 최대 번식지로서의 가치가 크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보물
집주금강반야바라밀경 권하
금강반야바라밀경은 줄여서‘금강경’이라고도 부르는 조계종의 근본경전으로, 금강석과 같은 견실한 지혜로 깨달음의 세계에 도달할 것을 주요사상으로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반야심경 다음으로 많이 읽히는 경전이다.
이 책은 금강경에 대한 여러 명의 풀이집을 모아 편집한 것으로, 전체 32분(分) 가운데 제15분(分)부터 제32분(分)까지 수록되어 있다. 태종 17년(1417)에 나무에 새겨 닥종이에 찍어낸 것이며, 크기는 세로 27㎝ 가로 17.5㎝이다.
책의 끝부분에는 경전이 지향하는 바를 적은 글과 영경사(永慶寺)의 도과법사(道顆法師)가 돌에 새겨 찍어낸 것을 원본으로 했음을 밝히는 글이 있다. 이어 본문의 교정표·육조대사의 서문·간행경위를 적은 기록이 있는데, 간행기록 외에는 원본에 붙어 있던 것을 그대로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보물
춘천 칠층석탑
춘천 시가지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탑이다. 조선 인조 때 이곳의 현감이었던 유정립이 인조반정으로 파직당하고 낙향하여 이 탑 부근에 집을 세우려고 터를 닦다가 ‘충원사(忠圓寺)’라는 글이 새겨진 그릇을 발견하여, 충원사 내에 속하였던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한국전쟁 때 심한 손상을 입어 보존 상태가 좋지 않은 데다 기단의 일부가 지하에 파묻혀 있었는데, 지난 2000년에 시행된 전면적인 보수공사로 기단부의 제 모습을 찾게 되었다. 이 석탑은 아랫부분을 발굴 조사한 결과 2층기단 위에 7층의 탑신이 놓여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탑의 받침대 역할을 하는 윗층 기단도 탑몸돌에 비하여 제법 넓어 안정감이 있으며, 맨윗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긴 널판돌을 놓아 1층 탑몸돌을 괴고 있다. 7층에 이르는 탑신(塔身)은 위로 올라가면서 그 크기가 적당히 줄고 있는데, 기단이 넓은 것에 비해 몸돌이 작아 주목되지만 7층이나 되는 높이가 비례의 불균형을 보충하여 오히려 안정감을 준다. 느린 경사가 흐르는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1∼3층까지가 6단이고 4층 이상은 5단을 이루고 있으며, 네 귀퉁이가 살짝 들려있어 경쾌하다.
전체적인 모습으로 보아 고려 중기 즈음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이 모두 없어진 상태여서 아쉬움을 주고 있고, 지붕돌의 네 귀퉁이가 거의 파손된 상태이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보물
양양 오색리 삼층석탑
강원도 양양의 오색약수터에서 약 2㎞정도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한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이다. 이곳은 성국사(城國寺)터라 전해지는데 근거는 확실하지 않다. 3층석탑 외에 또다른 부재들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그리 넓지 않은 사찰이었다고 추정된다.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두고 있는 형태이다. 기단에는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위층 기단의 맨윗돌에는 네 모서리에 빗물이 흐르는 홈을 표시하였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 돌로 구성되었으며, 각 층의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는데, 1층 몸돌에는 사리를 두던 네모진 공간이 있다. 지붕돌은 윗부분에서 경사를 이루다가 네 귀퉁이에서 약간씩 들려 있어 탑 전체에 경쾌한 느낌을 더해준다.
완전히 쓰러져 있던 것을 1971년에 복원한 탑으로, 정연하게 구성된 2단의 기단과 지붕돌의 얇은 낙수면 등에서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보물
고성 건봉사 능파교
고성 건봉사의 대웅전 지역과 극락전 지역을 연결하고 있는 무지개 모양의 다리로, 규모는 폭 3m, 길이 14.3m, 다리 중앙부의 높이는 5.4m이다.
사적기에 따르면 건봉사는 신라 법흥왕 7년(서기 520년)에 아도 스님에 의해 원각사(圓覺寺)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 이후 신라 말 도선 국사가 중수한 뒤 절의 서쪽에 봉황새 모양의 돌이 있다고 하여 서봉사(西鳳寺)라 하였으며, 고려 공민왕 7년(1358년)에는 나옹 스님이 중수하면서 다시 건봉사라 이름하였다.
다리의 중앙부분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를 틀고 그 좌우에는 장대석으로 쌓아서 다리를 구성하였는데, 홍예는 하부 지름이 7.8m이고 높이는 기석의 하단에서 4.5m이므로, 실제 높이는 조금 더 높다.
조선 숙종 34년(1708)에 건립된 경내 불이문 옆의 '능파교신창기비(凌波橋新創記碑)'에 의하면 이 다리가 숙종 30년(1704)부터 숙종 33년(1707)사이에 처음 축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 영조 21년(1745)에 대홍수로 붕괴되어 영조 25년(1749)에 중수하였고, 고종 17년(1880)에 다시 무너져 그 석재를 대웅전의 돌층계와 산영루(山映樓)를 고쳐 쌓는데에 이용하기도 하였다.
규모가 비교적 크고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다리로, 축조연대와 건립자 등을 알려주는 비석을 갖추고 있어 홍예교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천연기념물
인제 미산리 개인약수
산 경사면에 흡수된 빗물이 암설을 통과하며 철분 등 무기물을 녹인 후 계곡 옆 틈으로 솟아 나고 있는데, 탄산뿐 아니라 철분의 함량이 높아 특유의 비린맛과 톡 쏘는 맛이 동시에 느껴지는 등 수질의 측면에서 매우 가치가 높다.
1891년 함경북도 출신의 ‘지덕삼’ 포수가 백두대간에서 수렵을 하다 발견하였다고 전해진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천연기념물
대암산·대우산 천연보호구역
대암산·대우산 천연보호구역은 펀치볼 분지와 그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대암산·대우산·도솔산 및 대암산 정상부근의 일명 큰용늪과 작은용늪을 포함하는 지역을 말한다. 펀치볼 지대는 지름 약 10㎞의 원형분지로, 분지벽과 주변의 능선은 편마암으로 되어 있으나 분지의 밑바닥은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이는 화강암이 편마암보다 침식이 빨라 분지가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대암산 정상 부근에는 큰용늪, 작은용늪이라 불리는 고지습원이 있는데, 작은용늪은 이미 그 원래의 모습을 상실하여 숲으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큰용늪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고지습원으로 연중 안개 끼는 날이 많은 특수한 환경이 조성되고 있어 생태계 연구에 좋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큰용늪에는 물이끼, 삿갓사초, 꼬리조팝나무, 꽃쥐손이풀 등의 식물군락이 있으며, 손바닥 난초, 비로용담, 끈끈이주걱 등의 희귀식물도 자라고 있다. 그 밖에 식물성 플랑크톤 63종, 돌말 19종과 천연기념물인 산양과 검독수리가 관찰된 바 있으며, 도룡뇽, 무당개구리, 줄흰나비 등도 볼 수 있다. 또 이 지역과 연결된 두타연계곡에서는 열목어를 비롯한 특산 어류 10여 종이 살고 있다. 대암산·대우산 천연보호구역은 분지·습원등 지형적으로 다양한 특징을 지니고 있고, 기후조건이 특이하여 희귀동식물이 자라고 있다. 또한 동식물의 남북한계·동서 구분의 현상이 나타나는 등 식물생태학·식물지리학적·식물분류학적 연구가치가 매우 큰 지역일 뿐만 아니라 다양한 동물상, 특이한 지형·지세 및 기후적 특성 등 다양한 자연 환경을 가지고 있어 학술적 가치가 크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현재 대암산ㆍ대우산의 보호를 위하여 공개제한지역으로 지정되어 있어 관리 및 학술 목적 등으로 출입하고자 할때에는 문화재청장의 허가를 받아 출입할수 있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천연기념물
철원 철새 도래지
철새는 계절에 따라서 번식지와 겨울을 지내기 위한 지역으로 이동하는 새를 말한다. 북쪽에서 번식을 하고 겨울에 우리나라로 오는 새를 겨울새라 하고, 봄에 남쪽에서 날아와 번식하고 가을에 다시 남쪽으로 가는 새를 여름새라 한다. 이 외에도 나그네새와 떠돌이새가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철새로는 뻐꾸기·백로·파랑새 등의 여름새와, 기러기·독수리·두루미·부엉이 등의 겨울새가 있다. 철원 천통리 철새도래지는 철원평야 가운데 있으며, 겨울에는 땅 속에서 따뜻한 물이 흘러나와 얼지 않기 때문에 철새들이 물과 먹이를 쉽게 구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곳에는 9월 중순∼10월 중순부터 두루미·재두루미·기러기 등 많은 겨울철새들이 시베리아로부터 내려와 겨울을 나고, 일본 등의 따뜻한 지방으로 가는 많은 겨울철새들이 쉬어가기도 한다. 겨울철에는 독수리와 같은 수리류도 볼 수 있으며, 두루미·재두루미 등의 귀한 새들이 와서 겨울을 지내고 일본에서 겨울을 보내는 재두루미와 흑두루미들도 이곳을 거쳐 북쪽으로 간다.
철원 천통리 철새도래지는 러시아·중국·일본 등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국제적인 철새도래지로서 매우 중요할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내륙의 겨울철새도래지를 대표하는 지역이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천연기념물
정선 반론산 철쭉나무 및 분취류 자생지
철쭉나무는 키가 작고 밑동에서 가지를 많이 치는 나무이다. 잎은 봄에 돋았다가 가을에 떨어지며 꽃은 늦은 봄에 연분홍색으로 핀다. 이 철쭉나무는 높이 4.39m, 둘레 0.84m로 나이는 약 200년 정도이고 해발 1,064m의 능선지대에서 자라고 있다. 이 능선지대에는 북방에서 자라는 식물인 분취류도 분포해 있는데 사창분취, 각시서덜취, 당분취, 복분취 등이 그것이다.
정선 반론산 철쭉나무와 분취류 자생지에 있는 철쭉나무는 지금까지 알려진 철쭉나무 중 가장 크며, 이 지역에서만 자라는 특산종인 분취류는 식물분포학적 가치가 크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보물
인제 봉정암 오층석탑
봉정암 오층석탑은 설악산 소청봉 아래 해발 1244미터 높이에 위치한 봉정암의 경내에 있는 높이 3.6m 규모의 석탑이다. 한용운이 쓴 『백담사사적기』(1923년)에 수록된「봉정암중수기」(1781년)에 따르면 지장율사가 당에서 얻은 석가불의 사리 7과가 이 탑에 봉안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이를 근거로 봉정암은 통도사, 상원사, 정암사, 법흥사와 함께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는 5대 ‘적멸보궁’의 하나로 인식되어 오고 있다. 그러나 탑의 형식상 그 구성이 단순하고 탑신의 체감률도 적은 편이며 옥개석에 구현된 양식 등은 고려후기 석탑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어 그 조성시기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석탑은 기단부․탑신부․상륜부의 3부분이 조화를 이루며 건립되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 탑은 거대한 자연암석을 기단으로 삼아 바위 윗면을 치석하여 2개의 단을 만들고 그 주변에 16개의 연잎을 돌려 기단부를 조성하였다. 그 위에 올려진 탑신석[몸돌]은 3층까지 모서리에 우주(隅柱, 기둥)가 모각되어 있고 탑신석 위에 올려진 두꺼운 옥개석[지붕돌]은 낙수면의 길이가 짧고 경사가 급하며 끝부분만 살짝 반전된 형태이다. 옥개석 아래로는 각 층마다 3단의 옥개받침이 두껍고 투박하게 조성되어 있으며, 옥개석의 윗면에는 탑신받침이 새겨져 있다. 상륜부는 연꽃 봉오리 혹은 보주 형태의 석재를 올려 단순하게 처리하였다.
봉정암 오층석탑은 기단부를 생략하고 자연암반을 기단으로 삼았다는 점, 진신사리를 봉안한 석탑이라는 점 그리고 고대의 일반형 석탑이 고려후기에 단순화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한국 불교건축사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보물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사리장엄구
월정사팔각구층석탑(국보)내 발견 유물일괄은 1970년 기울어졌던 팔각구층석탑을 해체 복원할 때 발견된 것으로 모두 9종 12점이다. 이들 일괄유물은 대체로 10∼11세기 경에 제작된 유물들이어서 석탑이 건립될 때 함께 납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일괄 유물로는 은제도금여래입상과 청동사리외합을 비롯하여 은제내합, 호리병 모양의 수정사리병, 금동제 사각향갑, 청동거울, 전신사리경 두루마리, 수라향갑 주머니, 명주보자기 등이 발견되었다.
월정사팔각구층석탑내 발견 유물일괄은 고려시대 초기의 금속공예사의 현황과 불교사상의 변화 연구하는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보물
삼척 죽서루
이 건물은 창건자와 연대는 미상이나 <동안거사집>에 의하면, 1266년(고려 원종 7년)에 이승휴가 안집사 진자후와 같이 서루에 올라 시를 지었다는 것을 근거로 1266년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뒤 조선 태종 3년(1403)에 삼척부의 수령인 김효손이 고쳐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누(樓)란 사방을 트고 마루를 한층 높여 지은 다락형식의 집을 일컫는 말이며, ‘죽서’란 이름은 누의 동쪽으로 죽장사라는 절과 이름난 기생 죽죽선녀의 집이 있어 ‘죽서루’라 하였다고 한다.
규모는 앞면 7칸·옆면 2칸이지만 원래 앞면이 5칸이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도 천장의 구조로 보아 원래 다른 형태의 지붕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지만 재료 형태는 다른 양식을 응용한 부분이 있다. 또한 기둥을 자연암반의 높이에 맞춰 직접 세운 점도 특이하다.
이 누각에는 율곡 이이 선생을 비롯한 여러 유명한 학자들의 글이 걸려 있다. 그 중 ‘제일계정(第一溪亭)’은 현종 3년(1662)에 허목이 쓴 것이고,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는 숙종 37년(1711)에 이성조가 썼으며 ‘해선유희지소(海仙遊戱之所)’는 헌종 3년(1837)에 이규헌이 쓴 것이다.
주변 두타산의 푸른 숲, 삼척시의 서쪽을 흐르는 오십천이 내려다 보이는 절벽 위에 있어 예로부터 관동팔경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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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 신흥사 극락보전
속초 신흥사 극락보전은 신흥사의 본전(本殿)으로, 조선 인조 25년(1647)에 처음 지어진 이후 영조 25년(1749), 순조 21년(1821)에 크게 수리하여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건물은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으로 되어 있으며,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팔(八) 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는 장식 구조인 포(包)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왕실에서 죽은 이의 명복을 빌고자 세운, 18~19세기 영동 지방의 중요한 원당사찰로 세부 장식과 공포(栱包) 형식이 우수하고 기단(基壇)과 계단, 창문 등이 잘 보존되어 있다. 특히, 기단에 조각한 모란과 사자 모양 무늬와 계단 난간 소맷돌의 삼태극, 귀면(鬼面), 용머리 모양 조각들은 다른 사찰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창문은 솟을빗꽃살* 등 다양하고 화사한 꽃살로 장식했으며 보존 상태도 우수한 편이다. 내부에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모셔져 있다. 천장에는 우물 정(井) 자 모양으로 마감한 우물천장과 닫집**, 단청 문양이 온전하게 남아 있다. 신흥사 극락보전은 형태나 구조, 장식들이 예술적으로 뛰어날 뿐 아니라 보존 상태가 좋아 역사적, 건축적, 예술적 가치가 높다.
* 솟을빗꽃살: 전통 건축에서, 창이나 문의 가로 살과 세로 살을 60도로 교차하여 그 교차점에 수직으로 살을 대고 꽃 모양으로 새긴 것
** 닫집: 궁전 안의 옥좌 위나 법당의 불좌 위에 만들어 다는 집 모형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보물
이이 수고본 격몽요결
이이 수고본 격몽요결(李珥 手稿本 擊蒙要訣)은 율곡 이이(1536∼1584)선생이 42세 때인 선조 10년(1577) 관직을 떠나 해주에 있을 때 처음 글을 배우는 아동의 입문교재로 쓰기 위해 저술한 것이다.
이이는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정치가로, 23세 때 별시에서 장원을 한 후 벼슬길에 올랐고, 호조좌랑, 예조좌랑, 우부승지를 거쳐 47세 때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이의 성리학 사상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역사전개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이외에도 <시무육조>를 세우고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다. 그가 죽은 후 전국 20여개 서원에 위패가 모셔졌으며, 시호는 문성이다. 저서로는 『격몽요결』 외에 『성학집요』, 『기자실기』, 『만언봉사』 등이 있다.
이 책은 율곡이 직접 쓴 친필 원본으로 한지에 행서체로 단아하게 썼으며, 내용은 제1장 <입지>에서부터 <처세>의 항목으로 나누어 제10장으로 구성하여 서술하였다. 특히 이 책머리에는, 정조 12년(1788)에 이 책을 친히 열람하고 제목에 글을 지어 문신 이병모(1742∼1806)에게 명해 이를 책머리에 붙이게 하였다. 『격몽요결』은 조선 중기이후 일반에게 널리 보급되어『동몽선습』과 함께 초학자의 입문서로 근세에까지 많이 읽혀져 왔다.
더욱이 이『격몽요결』은 여러차례 목판본이나 활자본으로 출간되어 왔으나, 유일한 친필본은 율곡의 이모가 시집간 권씨집안에 율곡의 유품과 함께 대대로 소장되어 왔으며, 이것은 율곡이 친히 쓴 친필원본으로 그 가치가 크다고 평가된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보물
강릉 오죽헌
신사임당(1504~1551)과 율곡 이이(1536~1584)가 태어난 유서 깊은 집이다.
사임당 신씨는 뛰어난 여류 예술가였고 현모양처의 본보기가 되는 인물이며, 신씨의 아들 율곡 이이는 조선시대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훌륭한 학자였다.
오죽헌은 조선시대 문신이었던 최치운(1390∼1440)이 지었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앞면에서 보면 왼쪽 2칸은 대청마루로 사용했고, 오른쪽 1칸은 온돌방으로 만들었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부재들도 새부리 모양으로 빠져나오는 간결한 형태로 짜은 익공계 양식으로 꾸몄다.
우리나라 주택 건축물 중에서 비교적 오래된 건물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며, 유서 깊은 역사를 가진 건물이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천연기념물
정선 정암사 열목어 서식지
열목어는 연어과에 속하며 20℃ 이하의 차가운 물에서 사는 민물고기이다. 몸의 바탕색은 황갈색이며 머리·몸통·등에는 자갈색의 무늬가 불규칙하게 흩어져 있고 배쪽은 흰색에 가깝다. 알을 낳을 때는 온몸이 짙은 홍색으로 변하며, 등지느러미와 가슴지느러미 부분에는 무지개 빛의 광택을 내어 아름답다. 물 속에 사는 곤충이나 작은 물고기를 먹고 산다.
한반도는 열목어 분포의 최남한지로서 학술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어 그 서식지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열목어 서식지는 찬 수온을 유지하기 위한 고지대의 숲이 잘 발달하여야 하는데, 그와 같은 조건을 가진 수역이 드물기 때문에 남한강과 북한강의 상류 수역에서 불연속적으로 분포한다. 정암사 열목어 서식지는 남한강 상류의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 소재 정암사 옆 계류지역으로,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오대산 월정사 근처에서 폭포를 타고 오르는 열목어 떼의 장관을 볼 수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천연기념물
평창 섭동굴
광산개발 중 발견된 섭동굴은 지하수의 발달단계에 따라 3층 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각 층별 동굴의 발달형태와 이에 따른 동굴생성물이 성장하는 과정을 단계별로 관찰할 수 있는 매우 학술적 가치가 높은 동굴이다.
동굴의 최상층은 동굴의 발달단계상 마지막 단계로 동굴수의 유입이 매우 적어 상대적으로 건조하여 석화와 곡석이 우세하게 자라고 있고, 중층은 우기에 간헐적으로 동굴수가 유입되는 지역으로 종유석, 석순, 석주 등이 분포하고 있으며, 최하층은 지하수가 흐르는 수로가 발달한 층으로 지하수의 유입 정도에 따라 종유석, 석순, 석주, 유석 커튼과 석화, 곡석, 동굴진주, 휴석 등 다양한 동굴생성물이 성장하고 있다.
현재 섭동굴은 동굴 생성물 등의 보호를 위해 공개제한지역으로 지정되어 있어 관리 및 학술 목적 등으로 출입하고자 할 때에는 문화재청장의 허가를 받아 출입할 수 있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천연기념물
영월 하송리 은행나무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나무로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가 전해질 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을 단풍이 매우 아름답고 병충해가 없으며 넓고 짙은 그늘을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어 정자나무 또는 가로수로도 많이 심는다.
영월의 은행나무는 나이가 1,000∼1,200년으로 추정되며, 높이 29m, 둘레 14.8m이다. 처음에는 대정사(對井寺)라는 절 앞에 서 있었으나 절이 사라지고 주택이 들어서면서 마을 가운데에 위치하게 되었다. 나무의 원래 줄기는 죽어 없어지고 지금의 줄기는 새싹이 돋아 자란 것이라고 한다. 현재는 마을의 정자나무 구실을 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나무 속에 신통한 뱀이 살고 있기 때문에 동물이나 곤충이 접근하지 못한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어린 아이들이 나무에서 떨어져도 상처를 입지 않으며 정성을 들여 빌면 자식을 낳는다는 전설도 있다.
영월의 은행나무는 크고 오래된 나무로서 생물학적 가치가 클 뿐만 아니라, 조상들의 종교적·문화적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서의 가치도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천연기념물
영월 무릉리 요선암 돌개구멍
다양한 형태와 규모의 하식기원 돌개구멍들이 화강암반 하상 위에 폭넓게 발달되어 있어, 하천의 윤회와 유수에 의한 하식작용 등을 밝힐 수 있는 학술 가치가 크며, 여러 개의 돌개구멍이 복합적으로 발달된 지형자체가 가지는 경관 가치도 우수하다.
※ 요선암(邀仙岩) : ‘신선을 맞이하는 바위’라는 뜻으로 조선시대 문예가 봉래 양사언이 평창군수 시절, 이곳의 풍광을 즐기며 암반위에 ‘요선암’이라고 새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 돌개구멍(Pot Hole) : ‘속이 깊고 둥근 항아리 구멍’이란 의미로 하천에 의해 운반되던 자갈 등이 오목한 하상의 기반암에 들어가 유수의 소용돌이와 함께 회전하면서 기반암을 마모시켜 발달하는 지형. 보통 하천의 상류지역에서 빠른 유속과 큰 에너지를 바탕으로 형성된 와지에 자갈이나 모래와 같은 퇴적물질이 들어가, 와동류(회오리가 이는 듯한 물살)에 의해서 반복적인 회전운동을 통해 포트 홀 내벽을 침식, 점차 포트 홀이 성장하게 되며, 지속해서 내벽 및 하부침식이 일어나 커다란 항아리 모양으로 기반암을 파게 됨. 주로 사암이나 화강암과 같은 등질성의 단단한 암석에서 잘 발달하며, 형태로는 원형이나 타원형이 다수를 차지한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천연기념물
삼척 궁촌리 음나무
음나무는 보통 엄나무라고 불리며 우리나라를 비롯해 일본·중국·만주·우수리 등지에 분포한다. 연한 잎은 나물로 먹고 가시가 있는 가지는 악귀를 물리치는데 사용하였다. 옛날에는 이 나무로 6각형의 노리개를 만들어 어린아이에게 채워 줌으로써 악귀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는데, 이것을 ‘음’이라고 하여 음나무로 불리워졌다.
이 음나무는 나이가 약 600~1,000년 정도로 추정(지정일 기준)되며 높이 18m, 둘레 5.43m의 크고 오래된 나무이다. 나무 둘레에는 돌담을 쌓아 보호하고 있는데, 담 안에 고욤나무와 뽕나무가 있고, 담 밖에는 큰고욤나무, 향나무, 소나무가 서 있다.
마을사람들은 이 나무들을 모두 소중히 여기고 있으며 특히 음나무는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여겨 나무에 금줄을 치고 부정한 사람이 나무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고 있다. 매년 음력 정월과 단오에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며, 단오 때는 그네뛰기, 널뛰기, 농악놀이 등 잔치를 벌인다.
이 음나무는 오랜 세월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속에 자라온 민속적 자료로서의 가치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음나무 중의 하나로서 생물학적 자료로서의 가치도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천연기념물
삼척 초당굴
삼척 초당굴은 대형 동굴로, 총길이가 약 4㎞로 추정된다. 초당굴은 백색과 회백색, 연홍색의 석회암으로 되어 있고 수직굴과 경사로, 수평굴의 3단계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동굴 안에는 고드름처럼 생긴 종유석과 땅에서 돌출되어 올라온 석순, 종유석과 석순이 만나 기둥을 이룬 석주 등 다양한 동굴 생성물이 많다. 또한 크고 작은 연못이 연속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동굴속에는 지하수가 계속 흘러 밑바닥 아래층의 굴로 흐르고 있는데, 이곳에는 세계적으로 매우 희귀한 물김이 자생하고 있다.삼척 초당굴은 대형 석회암동굴로 종유석, 석순, 석주 등의 동굴 생성물이 화려할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희귀한 물김이 자라고 있어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 현재 초당굴은 동굴 생성물과 동굴 생물의 보호를 위해 공개제한지역으로 지정되어 있어 관리 및 학술 목적 등으로 출입하고자 할 때에는 문화재청장의 허가를 받아 출입할 수 있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천연기념물
속초 설악동 소나무
설악동 소나무는 속초에서 설악동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으며, 나이는 500년 정도로 추정(지정일 기준)된다. 높이 16.5m, 둘레 4.03m의 크기로 지상 2m에서 분지한 큰 가지 2개는 고사했고 지상 8m에서 크게 2개의 가지로 갈라져있다. 나무의 밑동에 돌을 쌓으면 오래 산다는 전설이 있어서인지 나무밑동 근처에는 돌이 많이 쌓여 있다.
설악동 소나무는 마을을 지켜주는 서낭나무로서의 민속적 가치와 함께 오래되고 큰 나무로서 생물학적 보존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천연기념물
태백산 천제단
태백산은 『삼국사기』를 비롯한 여러 기록에서 신산(神山)으로 섬겨져 제천의식의 장소가 되었음을 엿볼 수 있는데, 천제단은 이러한 제를 올리기 위해 만든 제단이다. 천제단은 태백산 정상에 있는 천왕단을 중심으로 북쪽 약 300m 떨어진 곳에 장군단과 남쪽 아래에 있는 이름 없는 제단(하단, 下壇)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북에서 남으로 일직선상에 배열되어 있다. 천왕단은 2m 남짓한 높이로 자연석을 쌓아 남쪽으로 단을 조성한 원형제단이다. 그 위에 4각 자연석 제단과 대종교에서 단군을 모신 장소로 성역화하는 과정에서 세운 것으로 알려진 “한배검”이라고 쓴 비석이 있다. 장군단은 남쪽에 계단이 있는 석단으로 내부에 제단이 있으며 그 위에 자연석을 비석처럼 세워 놓았다. 천왕단 남쪽 아래의 숲 속에 위치한 하단은 규모가 작고 강원도 산간에 서 흔히 볼 수 있는 돌탑보다 약간 큰 규모의 제단으로 소박하고 단아한 인상은 준다. 제단을 세운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부족국가시대부터 이곳에서 천제를 지냈다고 전해지는 것을 보면 그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태백산 천제단은 신라, 고려, 조선을 거쳐 일제강점기까지 천제를 지낸 의식이 전해져, 매년 개천절에는 국가의 태평과 안녕, 번영을 기원하기 위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장소로 이어지고 있다. 또한 매년 개최되는 강원도민체전의 성화 채화 장소로도 이용되고 있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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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 구문소 오르도비스기 지층과 제4기 하식지형
태백 구문소(求門沼)는 황지천 하구의 물길 가운데 있다. 구문(求門)은 구멍·굴의 옛말이며 ‘굴이 있는 늪’이라는 뜻을 나타낸다. 현재의 황지천은 하식동굴과 구문소를 지나 흐르면서 철암천과 합류하여 낙동강으로 이어지고 있지만, 과거 동굴이 뚫리기 이전의 황지천은 동굴의 남서쪽을 크게 휘돌아 곡류하였으나 동굴이 뚫림으로 인하여 오늘과 같이 흐르게 되었다.
태백 구문소 부근의 석회암에는 건열, 물결자국, 소금흔적, 새눈구조 등의 퇴적구조와 삼엽충, 완족류, 두족류 등의 다양한 생물화석이 나오고 있어 전기고생대의 퇴적환경과 생물상을 동시에 볼 수 있다. 또한 동굴을 관통하며 흐르는 황지천 하류의 물길은 현내천과 함께 하천 물길의 변천을 연구하는데 학술상 매우 흥미로운 곳이다. 구문소는 『세종실록지리지』 등의 고문서에 천천(穿川:구멍 뚫린 하천)으로 기록이 남아 있으며 다양한 전설과 함께 그 경관이 매우 아름답다. 태백 구문소의 고환경 및 침식지형은 퇴적구조, 침식지형 등 다양한 지형, 지질 특성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기고생대의 고환경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서 학술적 가치가 크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천연기념물
강릉 오죽헌 율곡매
오죽헌이 들어설 당시인 1400년경에 이 매화나무도 같이 심겨졌다하며, 신사임당과 율곡이 직접 가꾸었다고 전해진다. 신사임당은 고매도, 묵매도 등 여러 매화 그림을 그렸고, 맏딸의 이름도 매창(梅窓)으로 지을 만큼 매화를 사랑하였다. 신사임당이 태어날 당시부터 이미 상당히 굵었을 고목 매화를 보아온 추억을 살려 훗날 매화 그림으로 승화시켰을 것으로 짐작되는 역사성이 깊은 나무이다.
매화의 여러 품종 중 꽃 색깔이 연분홍인 홍매(紅梅) 종류이며, 3월20일 전후 꽃이 필 때는 은은한 매향이 퍼져 오죽헌을 더욱 경건하게 한다. 다른 매화나무에 비하여 훨씬 알이 굵은 매실이 달리는 귀중한 자원이라는 점에서 학술적인 가치가 크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천연기념물
원성 대안리 느티나무
느티나무는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일본, 대만, 중국 등의 따뜻한 지방에 분포하고 있다. 가지가 사방으로 퍼져 자라서 둥근 형태로 보이며, 꽃은 5월에 피고 열매는 원반모양으로 10월에 익는다. 줄기가 굵고 수명이 길어서 쉼터역할을 하는 정자나무로 이용되거나 마을을 보호하고 지켜주는 당산나무로 보호를 받아왔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 옆에서 자라고 있는 원성 대안리 느티나무는 나이가 350년 정도로 추정(지정일 기준)되며, 높이 24m, 둘레 8.1m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튼튼하고, 온전한 나무이지만 지상에서 6m 정도 올라간 부위에서 잘라낸 한 가지의 밑부분이 썩어 들어가서 텅빈 큰 구멍이 생겼다. 뿐만 아니라 그 구멍에 누군가가 불을 질러 구멍 벽이 탔다. 1993년도에 불에 탄 부분을 수술하여 잘 자라고 있다.
원성 대안리 느티나무는 오랜 세월 동안 조상들의 쉼터가 되어 보살펴져 온 나무로서 문화적·생물학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천연기념물
원성 성남리 성황림
성황림(城隍林)은 마을을 보호하고 지켜주는 숲으로, 원성 성남리의 성황림은 마을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 있다.
성황림을 구성하는 있는 식물들로는 각시괴불나무, 음나무, 졸참나무, 층층나무, 피나무, 가래나무, 쪽동백나무, 들메나무, 박쥐나무, 산초, 보리수, 광대싸리, 복분자딸기, 찔레, 노박덩굴, 으름덩굴 등으로 중부 온대 지역을 대표하는 숲을 이루고 있다. 성남리 주민들은 치악산의 성황신을 마을 수호신으로 믿어 지난 100여 년 동안 매년 4월 8일과 9월 9일에 마을의 평화를 기원하며 제사를 지내 왔다고 하나 현재는 과학의 발달로 이러한 행사를 점차 하지 않게 되었다.
원성 성남리의 성황림은 온대 지방을 대표할 만한 활엽수림으로서 학술적 가치가 높고, 우리 조상들의 과거 종교관을 알 수 있는 민속자료로서의 기능도 하고 있으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천연기념물
양구 개느삼 자생지
개느삼은 오직 우리나라의 추운 지역에서만 자라는 식물이다. 평안남도, 함경남도, 강원도 북부 지역에서 드물게 볼 수 있다. 양구의 개느삼 자생지는 남한에서 최초로 발견되어 한반도 고유 식물 연구에 이바지하였다. 예전에는 개느삼이 추운 곳에서 자라므로 북한 지역에만 자라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양구의 한 초등학생이 숙제로 가져온 식물 표본이 개느삼으로 밝혀지며 남한에도 자라는 것이 알려졌다. 그 뒤로 인제, 춘천 등지에서 잇따라 야생 개느삼이 발견되어 보존을 위해 연구와 관리가 이어지고 있다. 개느삼은 콩과 식물로 잎이 넓고 줄기가 굵으며 키는 1m 정도로 자란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보물
제왕운기
『제왕운기』는 요안거사 이승휴(1224~1300)가 고려시대 말기인 충렬왕 13년(1287)에 중국과 한국의 역사를 운율시의 형식으로 차례대로 읊은 것이다. 상하 2권의 역사저술로 공민왕 9년(1360)경에 판각된 목판을 바탕으로 조선초기에 인쇄한 것으로 추정되는 목판본이며 전본이 희귀한 귀중본이다.
『제왕운기』는 정치폐단을 시정하여 국내적으로는 왕권의 강화를 통한 국가질서의 회복을 바라고, 국외적으로는 원나라 지배 하의 만족적 정통성 회복을 위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단군신화를 포함하는 고대사 연구의 문헌자료로서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한 五言과 七言의 詠史詩는 가사문학의 원초적 형태로 고대의 소설에도 많은 영향을 미쳐 이규보의 『동명왕편』,「역대가」와 함께 국문학연구의 문헌자료로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 판본은 고려시대 판각본에 해당되며하권제8장의 보판을 제외하면, 이미 보물로 지정된 판본들에 비하여 결락이 없고 인쇄상태도가 비교적 양호하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보물
원주 학성동 철조약사여래좌상
이 철조약사여래좌상은 일제강점기까지 강원도 원주시 학성동(읍옥평) 들판에 방치되어 있던 다섯 구의 철불 가운데 하나로 현재 국립춘천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불상은 전체높이 110cm로 등신대(等身大)에 가깝고, 어깨는 둥글게 처진 모습이며, 신체 비례가 살아있는 사람과 흡사하다. 조형적으로 우수하고 보존상태가 양호한 나말여초기의 불상으로 철불의 제작기법 뿐 아니라 당시 유행했던 약사여래의 도상을 알려주며 원주지역에서 유행했던 조각양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이므로 한국조각사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이 매우 크다고 생각된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국보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강원도 철원군 화개산에 자리잡은 도피안사는 신라 경문왕 5년(865)에 도선대사가 창건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도선대사가 철조비로자나불을 만들어 철원의 안양사(安養寺)에 모시려고 했으나 운반 도중에 불상이 없어져서 찾아보니 도피안사 자리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에 절을 세우고 불상을 모셨다고 한다.
신라말에서 고려초에는 철로 만든 불상이 크게 유행했는데, 이 작품은 그 대표적인 예로, 불상을 받치고 있는 대좌(臺座)까지도 철로 만든 보기 드문 작품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갸름한 얼굴은 인자하고 온화한 인상이다. 평판적인 신체에는 굴곡의 표현이 없고, 양 어깨를 감싼 옷에는 평행한 옷주름이 형식적으로 표현되었다.
몸에 비해 가냘픈 손은 가슴 앞에서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양으로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모양이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는 이 시기에 가장 유행한 형태로, 상대와 하대에는 연꽃무늬를 새겼으며 중대는 8각을 이루고 있다.
불상 뒷면에 신라 경문왕 5년(865)에 만들었다는 내용의 글이 남아 있어서 만든 연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다.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하던 철조비로자나불상의 새로운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능숙한 조형수법과 알맞은 신체 비례를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이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국보
정선 정암사 수마노탑
『정암사사적기』에 따르면, 수마노탑은 신라의 승려인 자장이 당나라에서 바닷길로 귀국할 때 서해 용왕이 마노석 조각을 주며 탑을 세워줄 것을 부탁한 것이 건립의 유래로 전해지고 있다. 마노란 석영에 속하는 보석을 가리키며, 이것의 출처가 용궁이라는 물(水)에서 나왔다고 해서 수마노라는 명칭이 붙었다. 즉 수마노탑은 용궁에서 나온 푸른 마노석의 불탑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탑의 암석은 실제로는 마노가 아닌 칼슘과 마그네슘의 탄산염인 돌로마이트이다. 이를 통해 탑의 푸른색이 전승의 변화를 거쳐, 마노로 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전석탑은 석탑에 비해 견고성이 떨어진다. 이로 인해 수차례의 보수가 이루어졌으며, 현재의 수마노탑은 고려 시대에 다시 축조된 것이다. 이와 관련된 기록이 1972년의 해체보수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또 이때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사리장엄구 등이 함께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수마노탑은 총 7층에 높이는 9m, 너비는 3.04m으로, 모전석탑으로는 드물게 탑 정상의 금속 상륜부와 풍경 등이 거의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이로 인해 문화재 중에서도 높은 위상을 차지하는 우리 겨레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국보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강원도 평창군 오대산에 있는 상원사는 신라 성덕왕 4년(705)에 보천과 효명의 두 왕자가 창건한 진여원(眞如院)이라는 절에서 시작된 사찰로, 조선 세조가 이곳에서 문수동자를 만나 질병을 치료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이와 같이 상원사는 문수신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절로, 상원사의 문수동자상은 예배의 대상으로서 만들어진 국내 유일의 동자상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고개는 약간 숙인 상태이며 신체는 균형이 잡혀 있다. 머리는 양쪽으로 묶어 올린 동자머리를 하고 있으며, 얼굴은 볼을 도톰하게 하여 어린아이같은 천진스러움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넓은 어깨에는 왼쪽에서 오른쪽 겨드랑이로 가로질러 옷자락이 표현되어 있고, 가슴에는 구슬장식이 늘어져 있다. 옷주름은 신체의 윤곽에 따라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표현되었다. 오른손은 어깨 높이로 들어 엄지 손가락과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고 있고, 왼손은 엄지손가락과 약지 손가락을 거의 맞닿을 듯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왼쪽 다리를 안으로 접고 오른쪽 다리를 밖으로 둔 편한 자세로 앉아 있는데, 대좌(臺座)는 마련되지 않았다.
최근에 이 동자상 안에서 발견된 유물에 ‘조선 세조의 둘째 딸 의숙공주 부부가 세조 12년(1466)에 이 문수동자상을 만들어 모셨다’는 내용이 적혀 있어, 작품이 만들어진 시대와 유래가 확실하다는 점에서 조선 전기 불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국보
평창 월정사 석조보살좌상
월정사 석조보살상은 팔각구층석탑의 남쪽 전방에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 탑을 향해 무엇인가 공양을 올리는 자세를 갖추고 있는 점에서, 원래부터 탑과 공양보살상은 한 세트로 만들어진 것으로 이해된다. 이 보살상은 고려 후기민지(閔漬, 1248~1326)가 찬한『오대산사적(五臺山事蹟)』의 「신효거사친견오류성중사적(信孝居士親見五類聖衆事跡)」에 “탑 앞에 약왕보살의 석상이 손에 향로를 들고 무릎을 괴고 앉아 있는데, 전해오기를 이 석상은 절 남쪽의 금강연에서 솟아나왔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지금의 모습과 꼭 일치한다. 이에 따라 이 보살상은 대체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권6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에 근거하여 조성된 ‘약왕보살’로 일컫는다. 석조보살상은 전체적으로 양감이 강조된 모습이며, 안정되고 균형 잡힌 자세와 알맞은 비례를 갖추고 있으며, 보관과 귀걸이, 팔찌, 가슴 영락 장식 등 세부표현도 화려하고 섬세하다. 이와 같은 탑전(塔前) 공양보살상은 이전에는 찾기 힘든 고려 전기적 특징인 동시에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우리나라만의 독창적인 도상과 구성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와 의미를 지닌다. 또한 강원도 지역에 집중적으로 조성되어 고려 불교조각의 지역성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국보
평창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
국보 제48호 월정사팔각구층석탑이다. 이 석탑은 고려초기 석탑을 대표하는 다각다층석탑으로 석탑 앞에는 공양하는 모습의 석조보살좌상이 마주보며 앉아 있다. 고려시대가 되면 4각형 평면에서 벗어난 다각형의 다층(多層)석탑이 우리나라 북쪽지방에서 주로 유행하게 되는데, 이 탑도 그러한 흐름 속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고려 전기 석탑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탑은 8각 모양의 2단 기단(基壇) 위에 9개의 몸돌과 지붕돌로 구성된, 즉 9종의 탑신(塔身)을 올린 뒤,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한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에는 안상(眼象)을 새겨 놓았고, 아래·위층 기단 윗부분에는 받침돌을 마련하여 윗돌을 괴어주도록 하였다. 탑신부는 일반적인 석탑이 위층으로 올라 갈수록 급격히 줄어드는 모습과 달리 2층 탑신부터 거의 같은 높이를 유지하고 있으며, 1층 탑신의 4면에 작은 규모의 감실(龕室:불상을 모셔두는 방)을 마련에 두었다. 지붕돌은 밑면에 계단 모양의 반침을 두지 않고 간락하게 마무리하였고, 가볍게 들려있는 여덟 곳의 귀퉁이마다 풍경을 달아 놓았다. 지붕돌 위로는 머리장식이 완벽하게 남아 있는데, 아랫부분은 돌로, 윗부분은 금동으로 만들어서 화려한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당시 불교문화 특유의 화려하고 귀족적인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전체적인 비례와 조각수법이 착실하여 다각다층석탑을 대표할 만하다. 또한 청동으로 만들어진 풍경과 금동으로 만들어진 머리장식을 통해 고려시대 금속공예의 수법을 살릴 수 있어 더욱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국보
상원사 동종
범중은 절에서 시각을 알리거나 의식을 치를 때 사용한다. 종소리가 장엄하여 종교적인 분위기를 한껏 높이며, 종소리를 듣는 자 가 자신이 저지른 악한 행위를 깊이 뉘우치고 마침내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이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한 종소리가 울려 퍼지듯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펼친다는 뜻도 있다. 상원사 동종은 신라 성덕왕 24년(725)에 만들어진 것으로 지금까지 확인된 한국의 종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다. 본디 어느 사찰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안동 지역의 역사, 문화 등을 기록한 음지인 『영가지』에 따르면, 안동에 있던 중을 조선 예종 원년(1469)에 왕명에 따라 상원사로 옮겨 왔다고 한다. 종의 꼭대기에 용 모양으로 장식된 부분은 용뉴라고 하며, 이곳에 쇠줄을 연결하여 종을 매단다. 용뉴 옆에는 연꽃과 덩굴무늬로 장식한 음통이 있다. 음통은 일종의 음향 조절 장치로 추정하며, 우리나라 범종에서만 볼 수 있는 독창적인 구조물이다. 종의 몸통 위아래에는 구슬 장식 테두리가 있는 넓은 띠를 둘렀고, 띠에 있는 덩굴무늬 안쪽 곳곳에는 다양한 악기를 연주하는 천인(하늘에 살며 부처를 예찬하는존재) 들의 모습을 새겼다. 종을 치는 자리인 당좌에는 구슬과 연꽃무늬로 장식했으며, 당좌 좌우에는 구름 위에서 무릎을 꿇고 하늘을 날며 악기를 연주하는 비천상을 대형으로 새겨 놓았다. 경쾌한 모습의 비천상은 8세기 전반의 불교 조각 양식을 잘 보여준다. 몸통의 위아래가 안으로 좁아지는 항아리 같은 형태를 비롯해 한 마리의 용으로 장식한 용뉴와 음통을 갖추고 있는 등 한국 종의 고유한 특색을 보여준다. 이러한 형식은 후대에 만들어지는 범종들의 밑바탕이 되었다. 2008년 지금의 자리에 새로운 종각(종을 달아 두는 건물)을 지은 뒤 유리 안에 종을 두었으며, 옆에는 본떠 만든 종을 걸어 두었다종각을 지은 후 원래의 종은 유리 안에, 모본은 그 옆에 걸어두었다.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국보
강릉 임영관 삼문
강릉 임영관 삼문은 고려 말에 지어진 객사(客舍)의 정문으로, 객사는 관리나 사신이 지방을 여행할 때 숙소로 사용했던 관청 건물이다. 강릉 임영관 삼문은 현재 전해지는 문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고려 말에 지어졌으며 강원도에 있는 건축물 중에서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된 문화재다. 간결하고 소박한 주심포(柱心包)* 양식으로 지어졌고,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기둥은 가운데 부분이 볼록한 배흘림 형태이며, 기둥과 지붕이 만나는 곳을 세련되게 조각한 솜씨는 고려 시대 건축 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일제강점기 때 공민왕의 친필로 알려진 현판을 떼어 임영관 삼문에 걸었다가, 2006년 10월 임영관을 복원하면서 원래 있던 자리인 전대청(殿大廳)***에 옮겨 걸었다.
*주심포 : 기둥머리 바로 위에 짜 놓은 공포
**맞배지붕 : 건물의 모서리에 추녀가 없이 용마루까지 측면 벽이 삼각형으로 된 지붕
***전대청 : 전대청은 국왕을 상징하는 ‘전(殿)’자를 새긴 나무패인 전패(殿牌)를 모셔 둔 객사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곳으로.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절을 올리는 망궐례(望闕禮)를 행하였음.
(사진/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국보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36
대방광불화엄경은 줄여서 ‘화엄경’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기본 사상으로 하고 있다. 화엄종의 근본 경전으로 법화경과 함께 한국 불교사상 확립에 크게 영향을 미친 불교경전 가운데 하나이다.
이 책은 고려 현종 때(재위 1011∼1031) 부처님의 힘으로 거란의 침입을 극복하고자 만든 초조대장경 가운데 하나로, 당나라 실차난타(實叉難陀)가 번역한『화엄경』주본 80권 중에 권 제36이다.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종이를 길게 이어붙여 두루마리처럼 말아서 보관할 수 있도록 되어 있으며, 세로 28.5㎝, 가로 891㎝의 종이 17장을 이어붙인 것이다.
초조대장경은 이후에 만들어진 해인사대장경(재조대장경 또는 고려대장경)과 비교해 볼 때 몇 가지 차이점이 있다. 목판의 새김이 정교한 반면에 해인사대장경과 글자수가 다르고 간행연도를 적은 기록은 없으며, 군데군데 피휘(避諱:문장에 선왕의 이름자가 나타나는 경우 공경과 삼가의 뜻으로 글자의 한 획을 생략하거나 뜻이 통하는 다른 글자로 대치하는 것)와 약자(略字)가 나타난다. 또 초조대장경은 책의 장수를 표시하는데 있어서 대체로 ‘장(丈)’자나 ‘폭(幅)’자를 쓰는 데 비해 해인사대장경은 ‘장(張)’자로 통일되어 있다.
이 책도 장수를 ‘장(丈)’자로 표시하고 있는 점, 글자수가 23행 14자로 해인사대장경의 24행 17자 다른 점, ‘경(敬)’자에 한 획이 빠진 점 등으로 볼 때 초조대장경 판본임을 알 수 있다. 인쇄상태와 종이의 질 등을 고려해 볼 때 고려 현종 때인 11∼12세기경에 찍어낸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국보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비
탑비란 승려의 출생에서 사망까지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다.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 탑비는 고려 선종 2년(1085)에 지광국사의 삶과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지광국사는 원주 출신으로 8살의 나이에 출가하여, 21세에 승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성종에서 문종에 이르는 다섯 왕을 거치면서 최고의 승려로 활약하였다. 역대 왕들은 자주 지광국사를 왕실로 초청해 말씀을 들었고, 임금과 함께 국왕의 수레인 어가를 타고 다녔다. 특히 문종은 지광국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극진하게 대접하였다. 지광국사는 문종 24년(1070)에 87세의 나이로 법천사에서 입적하였다. 지광국사탑비는 거북 모양의 받침돌 위에 몸돌을 세우고 왕관 모양의 머릿돌을 올린 모습으로 전체 높이는 4.55m이다. 받침돌에 있는 거북의 얼굴은 용의 얼굴과 비슷하다. 특히 등껍질에 사각형을 여러 개 그리고 그 안에 왕(王) 자를 새겨 장식한 점이 독특하다. 탑비에 섬세하고 화려하게 새겨진 연꽃·구름·용 등은 당시 조각 예술의 최고 경지를 보여 준다. 특히, 몸돌 양 옆면에 구름과 어우러지게 새겨진 용 두 마리가 정교하면서도 사실적이다.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
국보
강릉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
원래 강원도 강릉시 한송사 절터에 있던 보살상으로 1912년 일본으로 옮겨졌다가, 1965년 조인된 ‘한일협정’에 따라 되돌려 받았다. 잘려진 머리 부분을 붙일 때의 흔적과, 이마 부분의 백호(白毫)가 떨어져나가면서 입은 손상이 남아 있을 뿐 거의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머리에는 매우 높은 원통형의 보관(寶冠)을 쓰고 있으며,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관 위로 높이 솟아 있다. 볼이 통통한 네모난 얼굴에는 눈이 가느다랗게 새겨져 있고,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번져 있다. 목에는 굵은 3줄의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으며, 3줄의 목걸이가 가슴까지 내려와 있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에는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옷주름이 새겨져 있다. 검지 손가락을 편 오른손은 연꽃가지를 잡고 가슴까지 들어 올렸으며, 왼손 역시 검지 손가락을 편 채 무릎 위에 올려 놓았다. 발은 오른쪽 다리를 안으로 하고 왼쪽 다리를 밖으로 하고 있어서 같은 곳에서 발견된 강릉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보물)과 반대이다.
한국 석불상의 재료가 거의 화강암인데 비하여 이 보살상은 흰 대리석으로 만든 점이 특이하다. 조각 수법과 아울러 재료에서 오는 질감이 좀 더 우아하고 온화한 기품을 느끼게 해준다. 약간 오른쪽으로 향한 듯한 얼굴과 몸은 풍요로우며, 조각수법 또한 원숙하고 정교하다. 원통형의 보관이나 풍만한 얼굴, 입가의 미소 등은 강릉 신복사지 석조보살좌상(보물)과 평창 월정사 석조보살좌상(국보)에서도 공통적으로 보이는 특징인데, 이들보다 한층 더 세련된 솜씨를 보여주고 있으며 만든 시기는 고려 초인 10세기로 추정된다.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강원문화유산 아카이브)